미디어 다음은 그간 지하철, 이주 노동자, 동성애, 장애인 등 이슈들을 비교적 조심스럽게 다루고 네티즌들의 의견을 함께 짚어보는 시도를 하며 포탈 사이트에서의 여론 생산 가능성을 확장시켜왔다. 하지만 이번 ‘신모계사회’ 특집은 원인과 결과, 현상과 전망에 있어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체 미디어 다음이 ‘일부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말하는 신모계사회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부 전문가들은 늘어나는 처가살이와 여성이 가장인 가정에서 원시시대 모계 사회의 모습을 떠올린다. 혼인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가 결국에는 사실혼 관계의 증가로 나타나고 유목민처럼 디지털 사회를 유영하는 개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남성은 바람처럼 왔다 사라지고 여성이 아이들과 가정의 중심이 되는 사회, 성별에 따른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고 가족은 가문 승계가 아닌 ‘양육’을 위한 최소한의 단위로 기능하는 사회, 과연 원시시대 모계사회가 21세기 신인류를 통해 재현될 것인가?“ (커버스토리 - 신모계사회를 말한다)이 기사의 논리를 따르자면 ‘디지탈 사회’의 개인은 전통적 가족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그 결과 가정은 ‘양육’을 위한 곳이 되고, 여성이 그 가정의 중심이 되어 모계사회가 출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를 그대로 이해하자면 정말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디지털을 제대로 ‘유영’하는 것은 “바람처럼 왔다 사라지는” 남성뿐이다. 그 전에는 한국남성들이 양육비를 대는 것 외에 아이 기르는데 구체적인 책임이 있어서 기저귀 갈고 유치원 데려다 주고 있었나? 이제 남성들이 양육노동뿐 아니라 경제적인 책임까지 지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 모계사회 출현의 징후인가?
“모계 사회의 또다른 징후 - ‘처가살이’ 증가: 일반적인 가정 중에 외가 중심의 육아가 이뤄지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외가 중심 육아 역시 여성 중심의 생활의 일종…” (디지털 시대, ‘신모계사회’가 온다)원시 모계사회에 대한 ‘전문가’들의 엇갈리는 주장들을 여기서 다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명확한 것은, 지금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예시들은 모계사회의 징후라기보다는 한국에서는 자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양육에 관한 한 맞벌이 부부에겐 가족에 기대는 것 외에는 여전히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덧붙여 여성들은 노후에도 모계던 부계던 간에 혈연에 기반한 돌봄 노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설마 시아버지나 친정 아버지가 외손자들의 양육을 절대적으로 책임지고 있을까?)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한 사회는 남성 중심을 여성 중심으로, ‘신모계사회’로 바꾸고 있다”고 전망했다. 김 부국장의 전망에는 한국 여성들의 포용력과 모성애에 기반한 ‘수평적 리더쉽’, 아줌마들의 ‘수다’에서 나타나는 왕성한 정보욕구 등이 디지털 유목민 사회에 적합하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디지털 시대, ‘신모계사회’가 온다)뭔가 새로운 얘기 같지만 ‘정보화’에서 ‘디지털’로 표현양식이 바뀌었을 뿐 지난 십 년간 반복되어 온 ‘21세기 정보화시대의 주역은 여성’이라는 추켜세움과 다를 바 없다. 정보화 시대의 도래가 여성세상을 보장하는 것처럼 언론에서 과장해 온 것에 반해서 여성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정보소외, 그리고 여성들이 점유하기 시작하는 기술은 가치 절하되고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이 지불되어 왔다는 것은 지적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보화 시대가 일부 여성 CEO 출현 등에 기여했을지는 몰라도, 다수 여성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정보/기술 격차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음의 기획 역시 마치 여성우위의 기술 세상과 새로운 가정형태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인데, 부수적인 ’그늘’로써 양육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기사를 이후에 덧붙이는 꼴이다.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한나라당 대변인 전여옥씨는 “지금 전세계는 모계사회로 진행 중”이라며 “여성을 중심으로 가족제도의 판이 새롭게 짜이고 있으며, 여성을 중심으로 남성은 원시수렵시대처럼 왔다가 가고, 또 오는 그런 모계사회가 다가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보편화된 사실혼제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신모계사회’가 온다)지금 한국의 상황은 북유럽이나 서유럽의 가족변화와 비교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굳이 비교하자면 아프리카, 서아시아의 노동계층, 빈곤층이나 극심한 경제위기나 전시상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에 가까워 보인다. 남성은 가정은 버리되 권위는 다 버리지 못하고, 여성들은 누적된 성차별로 인해서 경제적인 약자임에도 가정의 온갖 책임과 생계를 실질적으로 책임진다. 사회 복지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특히 양육과 노인, 병자에 대한 ‘돌봄 노동’은 일방적으로 여성에게 강화되는 상황 말이다.
게다가 기사에 언급된 유럽의 동거 가정들이 “남자들은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여자들이 나머지를 기꺼이 모가장으로서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실로 오산이다. 서유럽형 동거가정의 예시를 하나만 보자. ‘여자친구’와 동거하며 갓난아기까지 있던 삼십 대 중반의 한 남자는 아이가 너무 어려서 손이 많이 가는지라 전업을 가지기 어렵다며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여자친구가 요즘 진급과 직결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한참 바쁘다며, 아이를 데리러 일찌감치 퇴근했다. 한국에서도 그것이 당연한 풍경처럼 여겨지더라도 나는 진정한 모계사회니 여성상위 시대라고 호들갑 떨지 않겠다. 그것은 가정이 예전보다는 좀 더 융통성 있고 평등해지고 있는, 즉 원래 그러해야 할 방향으로 가고 있는 한 징후일 뿐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미래학자이자 광고학자인 자크 시겔라는 ‘미래는 밝다(Le futur a de l'avenir)’라는 책에서 21세기를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미래 사회의 모습의 주된 특징 중 하나도 바로 ‘모계사회’다. 그는 “20세기 들어서 치열해진 여권신장은 남녀간의 주도권 싸움이었으며 여권신장은 여성지배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디지털 시대, ‘신모계사회’가 온다)이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호주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한 한국인이 “그곳은 완전히 장애인 천국이다”라고 한 말과, 어렸을 때 들은 바 있는 “이제 여자들 세상이 올 거다. 딸 없는 부모들을 차별 받으면서 살 거다”라는 말이다. 전자는 장애인 이동권이 한국보다 좀 나아서 거리에서 장애인들을 볼 수 있었다는 피상적인 목격만으로 ‘천국’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는 점에서, 후자는 이 변화하는 세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고민하는데 그저 “변하고 있다”고 동문서답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자들이 바라는 것은 ‘천국’도, ‘낙관적인 미래’도 아니고 좀 더 평등하고 상식적인 현실의 세상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족형태 변화의 징후가 보인다면 그것은 부계에서 모계로의 이동이라기 보다는 혈연가족에서 좀 더 폭넓고 다양한 가족 형태로의 변화다. 여성정치인에 대한 언론의 호들갑과 마찬가지로 여러 징후들을 일관성 없이 섞어놓은 ‘신모계사회‘라는 가정 역시 실체가 없을 뿐더러 있지도 않은 남녀 대결구조를 조장하여 직면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할 뿐이다.
미디어 다음은 “신모계사회가 드리운 그늘 - 법이 사회변화를 못 따라”라는 이어지는 기획기사에서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서 증가하는 모자가정과 여성노동의 불안정한 현실을 짚어간다. 그러나 모가장 가구의 어려움은 신모계사회가 ‘여성지배’, ‘신인류’, ‘디지탈 시대’ 등의 화려한 어구 없이, 현재 가정과 노동시장의 여성 차별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거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누적된 차별과 사회의 변화가 결합된 것이지, 디지탈 시대가 발생시킨 새로운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부분과 지향해야 할 부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면서 기사간의 시각 차이나 간극이 커진 것이다. 미디어 다음이 ‘디지탈 시대의 신모계사회’라는 기획 틀을 포기하고 현재 육아와 노동 관련해서 여성들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접근하거나 혹은 변화하는 가족 형태 면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면, 이런 갈지자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