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중구난방 사용되는 ‘커밍아웃’ 용어
동성애자에겐 삶과 존재의 문제인데…
나루   |   2007-07-24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커밍아웃’이라는 용어가 떴다. 무슨 일로 커밍아웃이 검색어 순위에 올랐을까. 유명 연예인이 커밍아웃을 한 것일까, 동성애자 권리단체에서 커밍아웃과 관련한 토론회라도 연 것일까, 아니면 지금 TV에서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나?

키읔, 어, 미음…. 검색창에 커밍아웃의 한글자모를 차례대로 치고 검색 버튼을 클릭한다. 하지만 익스플로어 창에 뜨는 것은 누군가의 커밍아웃 이야기도, 동성애자의 삶에 대한 고백도 아니었다. 검색된 내용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거짓 학력’ 문제였다.

<릴레이 ‘학력 커밍아웃’> (한국일보 2007년 7월 19일), <‘가짜학벌 커밍아웃’ …신정아, 이지영, 이현세 등 줄이어>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7년 7월 23일) 라는 제목의 기사들.

가짜학벌 커밍아웃, 정치성향 커밍아웃?

커밍아웃(Coming Out)이란 ‘벽장 밖으로 나오다(Coming Out of Closet)’는 뜻으로, 동성애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리는 행동을 일컫는다. 커밍아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의미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용어는 동성애자들이 그만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함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즉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인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공개할 수 없는 것이 마치 벽장 속에 갇혀 사는 것처럼 무척이나 갑갑하고 고통스럽다는 호소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본디 뜻과는 다르게 사용된다. 특히 선거철이 되거나 정치권에서 갈등이 끊이지 않는 시기에는, 커밍아웃이라는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한다.

<대선 앞두고 연예인도 속속 ‘커밍아웃’> (연합뉴스 2007년 7월 15일), <외줄(?) 타던 중립인사들 줄줄이 ‘커밍아웃’> (헤럴드경제 2007년 7월 13일), <대북 강경에서 ‘좌향좌’로 커밍아웃> (주간동아 2007년 7월 18일) 등, 언론은 유명인이나 정치가가 정치색을 드러내는 일도 커밍아웃이라고 부른다.

연예인이 성형 사실을 고백하거나 실제 나이를 밝힐 때도 커밍아웃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탈모스타의 커밍아웃, 하이모 CF 등> (세계일보 2007년 7월 17일) 이라든지 <中 “그래 우리 불량대국 맞다” 커밍아웃> (한국일보 2007년 7월 6일) 등의 기사 제목에서도 커밍아웃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커밍아웃’으로 검색한 후 기사 50여 건을 찬찬히 살펴봤지만, 동성애 관련한 기사는 고작 4건이었다. 정작 레즈비언인 나 자신에게는 커밍아웃이 익숙하지 않은 일인데, 언론이나 대중에게는 참 익숙한 용어가 된 모양이다.

‘커밍아웃’ 용어가 남용되는 까닭

물론 언어란 신기한 것이어서 원래 쓰이던 의미가 확장되거나 변형되기도 하는 법이다. 커밍아웃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그 단어의 뜻이 많이 알려져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커밍아웃이라는 용어가 중구난방으로 쓰이는 일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세상에는 쉽게 빗댈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지내다 온 지인은, 독일 사회에서는 나치 문양이나 나치군의 제복을 사용하는 일을 매우 경계한다고 했다. 이웃집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노는 것을 보고 농담으로라도 ‘너희 개구리 소년 되겠다’라고 말해선 안 되고, 집 벽에 금이 가있다고 해서 ‘우리 집은 삼풍백화점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비유가 용인되어 퍼져있지는 않다.

즉 사회적으로 합의된 고통, 대중이 공감하는 슬픔은 쉽게 비유 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건이나 용어가 띠는 상징성을 존중할 때에 한해서, 대화의 내용이 될 수 있고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커밍아웃이라는 용어가 동성애자의 삶과 전혀 무관하게 자주 쓰이는 것은, 우리 사회가 동성애자의 삶과 고통에 대해 알고 있거나 공감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오히려 언론이나 대중은 커밍아웃이라는 낱말이 띠는 선정성을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기사를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것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함부로 논하고 있다.(<새 트렌드 언니페미니즘> 경향신문 2007년 7월 12일)

동성애자의 삶에 대한 무지 반영

동성애자를 포함해서 장애인, 이주노동자,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서 무관심한 우리 사회는 이들의 삶을 빗대어 말을 만들어 낸다. 가령 ‘당신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를 넘어라’, ‘노인네처럼 빌빌거린다’는 표현이 있다. 사람들은 이미 걸림돌이나 방해물보다 ‘장애물’이라는 단어에 익숙하고, 동성끼리 친밀하게 지내면 비하의 의미를 담아 ‘호모같다’라고 놀린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이 당사자라면, 저런 비유를 쓸 수 있을까. 유명인이 지지하는 대선후보를 밝히는 것이나, 연예인이 성형 사실을 말하는 것이나,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를 쉽게 붙일 수 있을까.

커밍아웃을 하기 전까지의 숱한 고민들, 커밍아웃을 하면서 들어야 했던 혐오의 시선과 말들, 커밍아웃으로 인해 멀어진 친구들…. 반면 커밍아웃을 통해 느꼈던 희열과 자긍심, 내가 비로소 나 자신이 된 듯한 느낌. 동성애자들에게 커밍아웃은 삶과 존재의 문제다.

하지만 누군가들에게는 쉽게 갖다 붙일 수 있는 한낱 비유가 되어 버렸다. 씁쓸한 마음으로, 동성애자라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거짓 학력에 대한 기사만이 빼곡한 익스플로어 창을 닫는다. 여전히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는 ‘커밍아웃’이 달려 있다.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모르는, 그들의 세계.

기사입력 : 2007-07-24


Warning: count(): Parameter must be an array or an object that implements Countable in /home/inswave/ins_mobile/data/ins_skin/b/news_view_m_ildaro_com.php on line 160
뒤로가기 홈으로
광고

Warning: count(): Parameter must be an array or an object that implements Countable in /home/inswave/ins_mobile/data/ins_skin/b/news_view_m_ildaro_com.php on line 220
댓글

i

댓글 수정 및 삭제는 PC버전에서만 가능합니다.
07/07/24 [09:05]
커밍아웃이라는 말은 가슴이 철렁하게 만드는데, 여기저기서 다른 의미로 쓰는 걸 보면 씁쓸하다는
나무 07/07/24 [10:48]
커밍아웃은 외래어로, 그 말이 넓리 쓰여지기 시작한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기사에서 밝힌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를 칭하는 말인 것 같아 한 글 달아보았습니다.
TACKLE 07/07/24 [11:59]
왜 커밍아웃이 저런 데에 쓰이는 건지, 참. 어이없어요
fancy 07/07/24 [16:55]
소수자의 삶과 고통에 관련한 이야기는 쉽게 남용되어선 안되겠죠. 

언젠가 '애인' 이런 식으로 장애인 차별을 어이없게 해대던 아이들도 지금은 정신을 차렸겠지요.
독자 07/07/24 [23:32]
함부로 해선 안되는 것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따뜻한 감성이 느껴지는 군요.
이장원 07/07/25 [11:57]
"come out of the closet"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 그 비밀을 드러내거나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비록 동성애자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맥락에서 특히 빈번하게 사용되기는 하나, 동성애자들의 언어로 "독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도 언론이 "커밍아웃"이라는 용어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커밍아웃"이라는 용어는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가리키기 위해 차용된 외래어인데, 그 용어가 동성애라는 이슈와 연관되어 있음을 이용해 기사의 선정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다는 짜증나는 사실 때문입니다.  
sugar 07/07/25 [19:01]
커밍아웃은 어려운 상황을 담고 있으면서도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인데, 커밍아웃이란 말을 남용할 때 부정적이고 희화화시키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맥락없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휴우.. 07/07/25 [23:25]
커밍아웃이란 단어가 이렇게 빼앗기는 군요..
Yvan 07/07/26 [19:58]
'그러나 당신 자신이 당사자라면 그런 비유를 쓸수 있을까' 정말 공감합니다.
제가 이제껏 느껴왔던 것들을 잘 정리해진 글을 보니 마음이 다 시원하네요..^^
사람들과 말을 하다 보면 여러 소수자들에 대한 비유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결국 그 자리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려러니 .. 하고 넘기려 해도 결국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잠시 자리를 피해야 할 때도 있고.. 그럴때마다 정말 '남의 세상'에 '얹혀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rladmswjd 08/05/10 [10:03]
처음부터 느겼던사랑이아닌동성애는교회에전도를받고일년간만나다보니자연스럽게두사람같은어떤끌ㅅ림나이차가16년입니다힘이듭니다신앙이교회가두렵다분노를삭힐수있는방법없나요스트래스분노가제몸을힘들게합니다지금까지과정을글로고백하고싶네요분노를삭히고싶다
pleasel 14/01/09 [15:42]
나는 오히려 두루 쓰이는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성애가 정치성향이나 독특한 취미처럼 개인적인 성향으로 여겨지는 것이 무엇이 나쁘다는 건가? 실제로 우리는 아직 갈길이 멀지만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것 같다. 동성애가 개구리소년이나 삼품백화점처럼 극악한 단어인가? 동성애가 사회적 분노와 고통이 야기되는 반인륜적 사건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느껴진다.
pleasel 14/01/09 [15:43]
삼풍백화점 오타났네.

가장 많이 읽은 기사

URL 복사
x

홈앱추가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일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