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거나 익숙하거나

전시 <젠더 스펙트럼>(Gender Spectrum)

권세미 2008-08-02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홍대 부근의 요기가 갤러리와 더 갤러리 두 곳에서 <젠더 스펙트럼>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 주목하는 이유는 젊은 미술 작가와 기획자들이 남성 중심적인 제도권 미술계에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젠더를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위해 의기투합해서 만든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 소무라이 "무제" 캔버스 위에 아크릴 2008
<젠더 스펙트럼>은 ‘불길한 지혜’가 주관하고 김화용, 김주혜, 봉봉, 지원, 장미라, 소무라이, 최윤정 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여성, 남성으로 나뉜 획일적인 성별구조를 비틀어보고 다양한 젠더의 가능성을 실험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다. 젠더는 흑백처럼 여/남, 2개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빛의 스펙트럼처럼 다양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젊은 미술인들은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안티아라키전>(2003)과 레즈비언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작전L>(2005) 그리고 젠더의 해체를 얘기하는 <젠더 스펙트럼>(Gender Spectrum)까지 조금씩 다르면서도 일관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작전L>이 레즈비언 정체성을 긍정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즐거움과 자긍심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전시에서 아예 젠더나 성정체성은 해체된다. 왜 젠더를 해체하려고 하는 것일까? 전시를 기획한 김수영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억압에 대항해서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문화 쪽에서도 여성 섹슈얼리티를 부각시키고 여성성을 높이 평가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일부 한계를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는 여성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생각하게 됐다. 그게 젠더 자체를 무화(無化)시키는 방법이었다’고. 선을 긋고 쪼개기보다는 그 선 자체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것이다.
 
미술과 페미니즘, 퀴어. 새로운 이야기일까 이미 식상해진 이야기일까?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론에선 이미 오래된 주제로 취급되지만, 놀랍게도 한국의 수많은 전시들 중 젠더 해체를 본격적으로 다룬 기획전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미술계에서 젠더에 대한 관심이나 인식이 낮아서 이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들을 찾기조차 힘든 정도라고.
 
미술계에선 정치적인 시각을 가지고 여성문제를 주요하게 다루는 작가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다. 새로운 목소리와 신진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건강한 토양이, 한국 미술계에서는 다져지지 않은 듯하다. 그렇기에 젊은 미술인들의 노력이 값져 보인다.
 
쫓겨난 괴물의 세계와 ‘Green Sexuality
 
▲ 장미라 "taste 05" 디지털 프린트 2004   
더 갤러리에서는 ‘섹션2: 홍조 가득하다, 쫓겨난 괴물의 세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소무라이, 최윤정 그리고 장미라 세 작가가 참여했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미라의 사진 연작 “taste”다. 드랙퀸과 드랙퀸이 무대에 오르기 전 분장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찍은 사진들과 클로즈업 사진들이 함께 배치되어있다.
 
매혹적인 사진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반짝이는 불빛을 등지고 아직 분장을 다 마치지 않아 짧은 머리를 드러낸 드랙퀸이 입술을 칠하고 있는 사진이다. 그 사진 속에는 곧 드랙퀸으로 변신해 무대에 올라갈, 그러나 지금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이 있다. 여/남의 경계에 서 있는 순간의 사람을 바라보는 느낌이 묘하다.
 
추상화로 보이는 소무라이 작가의 그림들은 마치 말을 해체하듯 색과 선과 구도를 해체한 듯 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것, 트랜스 젠더, 바이섹슈얼, 간성인도 아닌 것을 그리라면 무엇을 그려야 할까. 조각난 몸, 여러 개의 가슴과 배꼽들이 이 질문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정의될 수 없는 정체성을 그림으로 재현할 때, 과연 선과 색들을 이어지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에 끼어버린 해변의 모래처럼, 사회가 재단해버린 성별이라는 것도 우리의 말과 생각, 행동, 이미지 사이에까지 빈틈없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골라내고 씻어내는 작업부터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마구 휘갈긴 것 같은 선들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몸의 조각들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절박함이다. 아직은 그림을 공유할 관람자까지 신경 쓸 수 없는 것 같은, 온통 분해되고 갈라진 이미지들. 그러나 그 그림들을 보고 마음이 시원하다 느낀 것은, 이 전시 안에서 가장 끝 간 데까지 간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최윤정 "세사람" 장지위에 채색, 100호. 2008  
다른 공간으로 들어서면 최윤정 작가의 그림이 있다.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꿈틀거리는,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고요한 느낌의 그림들이다. 여성이면서 남성인, 혹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간성인의 이미지가 식물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었다. 한 뿌리에서 뻗어 나와 얽혀있는 세 사람이 춤을 추듯 흐드러져 있고, 그 팔과 다리들에서는 잎이 자라 나와 있었다. 그 사람, 혹은 식물은 즐거워보이진 않았지만 힘차다.
 
그 방에 있는 그림 중에 유독 식물시리즈와 다른 독특한 그림이 하나 있었다. “Green Sexuality”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녹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테이블 위에 성별을 알 수 없는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상들을 올려놓고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 좌우에는 그 사람의 생각인 듯한(혹은 작가의 생각인 듯한) 글이 쓰여 있다.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이분법 안에 갇히지 않는 형상들의 섹슈얼리티를 꿈꾸고 고민하는 내용이다.
 
지하 갤러리에서 젠더의 카드놀이를 하다
 
더 갤러리를 돌아본 후, 요기가 갤러리로 가기 위해서는 5분정도 걷는다. 요기가 갤러리는 하얀 벽 위에 단정하게 그림이 걸려있던 더 갤러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인디밴드의 작업 공간, 혹은 젊은 예술가들의 지하 아지트 같은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소리가 들린다. 요기가 갤러리에는 애니메이션과 영상이 있어서 사진이나 설치작품을 보는 중에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곳에선 ‘섹션1: 젠더의 카드놀이’와 ‘섹션3: 그와 그녀가 없는, 사랑조차 없는 사랑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 김화용 "랄랄라~결혼질!-Be the Leds02" 2006    
가장 눈에 띤 작품은 김화용 작가의 “랄랄라~ 결혼질!! Be the Leds”이다. 편안하고 친밀한 느낌으로 함께 하는 두 여성을 담은 4장의 사진들이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유쾌하다. 이성애자들의 결혼제도에 문제제기하며 여성커플의 친밀한 모습을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턱시도와 화이트 드레스가 아닌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잔디밭에 누워있는 두 여성은 꼭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 오른 편에는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있다. 봉봉 작가의 “베갯 머리 송사”는 퀴어 연인들이 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를 녹음하고 그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독창적인 작품이다. TV속에서 잔잔한 그림들이 지나갔지만 안타깝게도 함께 흘러나오고 있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나긋나긋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연인들의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 옆에는 지원 작가의 설치작품 “Daily happenings”을 볼 수 있다. 테이블 위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공간이 어두워 그림을 자세히 보기는 좀 어려웠다.
 
전시장 안쪽에는 ‘불길한 지혜’ 외 다수가 참여한 영상 “유혹의 기술 1,2”가 상영되고 있다. 세 분할된 화면 안으로 남녀들이 무작위로 등장하여 서로 스킨십을 한다. 때로는 여/남이, 때로는 남/남이나 여/여가 등장하는데, 욕망하는 대상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시를 보고 돌아와서 생각이 더 많아졌다. 이 젊은 작가들이 힘을 합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그 속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피카소 전이나 밀레 전 등을 관람할 때와는 다른 경험이다. 나와 작품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렇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믿기로 했다.
 
전시의 준비과정과 작가들의 작품을 지켜보면서, 이 작가와 기획자들의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관심이 갔다. 이들이 꺼내놓은 이야기들과 작품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풍성해지고 발전해 갈까? 이 전시회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젠더 스펙트럼>은 그 긴 여정의 시작이라고 말이다.
 

관람시간 | 11:00am~08:00pm
요기가 표현 갤러리 Tel 02.3141.2603 www.yogiga.com
더 갤러리_THE GALLERY www.gallerythe.com

기사입력 : 200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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