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학번 남성’이 IMF세대를 대표하는가

MBC PD수첩 "IMF세대, 10년을 말하다" 편을 보고

정안나 2009-12-20

12월 15일자로 방송된 MBC PD수첩은 “IMF세대, 10년을 말하다” 편에서, IMF때 첫 직장을 구해야 했던 대졸자들의 고생담을 들어보고 10년 후 현재 삶이 어떠한지를 보도했다.
 
그런데 PD수첩에서 ‘IMF세대’의 표본집단으로 삼은 것은 모 대학교 경영학과 92학번 남성들이었으며, 그들의 아내들도 간간히 등장했다.
 
PD수첩을 보는 내내 맘이 언짢았다. PD수첩의 관점대로라면 1997년 구직난을 겪은 남자대학생 92학번이 ‘IMF세대’의 중심이자 대표 세대인 셈인데, 과연 그러한가? 그 시기에 첫 직장을 구하느라 고생했던 사람들의 형편을 모 대학 92학번 남성들이 대표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PD수첩은 제작진들의 경험 내에서 IMF 세대를 규정하여,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IMF세대를 이야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IMF때 고생한 사람들을 꼽아보자. 우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대졸자들보다 쉽게 직장을 구했다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또, 1997년에 직장을 구하려 한 대졸여성들은 대졸남성들보다 더 힘든 위치에 있었다. IMF이후 여대생취업난은 여성노동계의 주요한 이슈였다.
 
그러나 PD수첩의 IMF세대-92학번 취재는 철저히 IMF를 겪은 남자 92학번을 중심에 두었다. 재미있는 것은 IMF시대를 겪은 여성들도 ‘92학번 남자의 아내’ 자격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번 PD수첩 방송내용은 적은 숫자의 동질성이 높은 모집단인 대학 ‘동창생’을 중심으로 IMF를 특정 경험집단으로 한정시켰고, 그 결과 정확한 보도에서 멀어져 신변잡기로 머물게 되었다.
 
제작진들이 ‘대학 졸업’이라는 조건을 기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학번이 마치 나이와 같이 누구나 가지는 것, 혹은 대표로 쓸 수 있다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경제위기 속에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남성’으로 대표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특정한 학번이 특정한 세대가 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386세대, IMF 92학번. 이런 방식은 너무나도 ‘대학’ 중심이다. 20살에 반드시 대학을 가야만 시대를 대표하는 게 아니다. 진보진영에서도 성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학번’중심 문화다. 이번 PD수첩은 그동안 간과되어온 학번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씁쓸한 프로그램이었다.

기사입력 : 200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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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일다 10/01/11 [12:40]
역시 일다 굿이네요... 전 솔직히 생각도 못했는데, 이 글 읽고 보니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사 10/01/07 [15:28]
모집단으로 삼았던 92학번 남성들이 거액의 대출을 받아 부동산 거품에 일조하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나서는 진행자들이 '이 사회에 허리로 잘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는 식의 멘트를 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이번 피디수첩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았습니다.ㅜ.ㅜ
바람 09/12/28 [05:45]
네, 동의합니다. 한국 사회의 세대 논의는 주로 남성 대졸자 중심이지요...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여성들은 세대 논의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라이트 09/12/26 [13:18]
386세대, 397세대 라고 학번중심으로 세대를 묶어 이슈화하는 것의 맹점을 잘 짚어주셨네요. 세대에 대해 논하는 것은 좋지만, 이런 식의 세대론은 남성 대졸자인 좁은 관점을 일반화하는 것 같아 많이 불편했어요. 앞으로 일다가 남성,학번 중심의 세대론에 일침을 놓아주시기 바래요.
허당선생 09/12/23 [18:35]
백번 천번 지당하신 말씀. 방송보면서 내내 정말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방송인지 심각히 의문스러웠어요.
두기 09/12/22 [10:47]
옳은 지적이에요. 대졸자만 한정해보았을 때도 여대생들은 94, 95학번이 IMF한파의 희생양이었죠. 대놓고 92학번(군대갔다온 남자대졸자)=IMF세대라고 얘기하는 건, PD수첩이 여성배제적인 방송을 한 거죠.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을 기준으로 한 시대착오적인 프로였다고 생각해요.
nuno 09/12/21 [14:01]
학력에 따라서, 성별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계급(?)에 따라서 IMF세대들이 겪은 10년 경험은 각자 특색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IMF세대로서 공통점도 있을 거구요. 그런데 PD수첩에서 IMF세대 10년을 다룬다고 하면서, 특정 대학의 졸업자로 한정시켜서 추적하는 방식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만 범위를 넓혔어도 달랐을텐데, 오차범위가 너무 크다는 거죠. 전체적으로 무성의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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