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묻는 사회, 장애여성의 노동은?

<기록되지 않은 노동> 장애여성의 노동할 권리

최성미 2012-11-05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삶을 이야기하는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필자 최성미 씨는 여성노동자 글쓰기 모임 회원이며, 중증장애여성으로서 경험하는 노동의 의미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이 연재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자립한 장애여성,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나는 노동이라 불릴 수 없는 노동을 희망한다. 난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립생활을 15년 정도 하고 있는 30대 후반의 여성이다. 초등 교육조차 받지 못한 중증의 장애여성이 자립생활을 하기란 그 누가 얼핏 생각해도 녹록하진 않다고 여길 것이다.
 
내가 20대 후반에 집을 나와 맨 처음으로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먹고 살것인가였다. 우선 아주 작은 정보력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어냈다.
 
처음 몇 달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나보다 먼저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언니네 집에 얹혀 지내며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몰라도 무엇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기본적 지식이나 학력이 필수라고 생각해서다. 특히 난 장애라는 불리한 조건에 있으니.
 
자립 후 3년 만에 애초에 계획하고 목표한 대로 서른을 넘기기 전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졸업과 기본학력을 이수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내 학식은 형편없었지만 대부분의 대학에서 시행하는 장애인특별전형의 혜택을 받는다면 내 생활권인 인천이나 경기도 권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는 그리 힘들진 않았다. 하지만 등록금이 제일 큰 문제였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아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등록금이 저렴하다는 방송통신대학을 선택했다. 전공을 선택할 땐 더 많은 고심을 해야 했다. 경제력이 없는 형편에 힘들게 다녀야 하는 대학이었고, 졸업 후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어야 했고, 또 나의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런 많은 상황과 현실을 고려해 난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영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야말로 단순하고 유치(?)했다. 당시 내가 알기로는 영어를 잘하는 장애인은 참 드물었다. 게다가 중증장애인은 더더욱 그러했다. 만약 내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을 한다면 고학력의 여성장애인일 것이고 게다가 영어까지 잘 한다면 취업의 문이 한결 넓어지지 않을까? 정 취업이 힘들면 번역이라도 할 순 있겠지?
 
그때의 난 이렇게 순진하지만 절박한 동기와 희망을 품고 방송통신대학과 대학원 (학점은행제로 운영되는 인천시민대학원으로 이곳에서 초등영어지도사 자격증을 땄다.)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누구나 경험하듯 나 또한 사회에 첫발을 내딛어야 하는 시점이 왔다.
 
“이렇게 심한 중증이 올 줄은 몰랐다”
 
난 대학 졸업과 함께 내 생에 있어 유일하고 자랑스러운 자격증을 취득한 후 취업에 도전했다. 비장애인들에게 비하면 말거리도 안 되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난 최선을 다해 열 번 남짓의 서류 심사와 면접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동안 나름 힘들게 이루어온 나의 꿈과 현실의 괴리는 내가 감당하기엔 참으로 냉혹했다.
 
▲ 최선을 다해 열 번 남짓의 서류 심사와 면접을 경험했다. 그러나 나름 힘들게 이루어온 나의 꿈과 현실의 괴리는 내가 감당하기엔 참으로 냉혹했다.     © 일다
인터넷이나 구인광고에 버젓이 장애인 채용공고를 낸 회사들의 반응은 중증장애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당당히 살아가려는 내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나에게는 이력서를 제출했던 회사가 요구하는 심사 조건에 누락될 만한 단점이 없었는데도, 서류 심사에 통과해 면접을 보러 가면 면접관들은 대놓고 내 면전에 이런 말들을 했다.
 
“이렇게 심한 중증이 올 줄은 몰랐다.”
“어느 정도 생산성이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냐?”
“우리 회사에서 일하다 장애 때문에 수반되는 결과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겠다.”
“부모님은 이런 중증장애의 딸에게 재산도 물려주지 않고 뭐했냐? 이런 중증장애인 그것도 여성이 꼭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냐? 부모 복을 잘못 타고 났으니 남편이라도 잘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이나 많이 사귀어 봐라! 이 험난한 취업난에 뛰어들지 말고.”
“우리는 국가시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이라 중증장애인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정 원한다면 일은 하게 해 줄 수 있지만 장애인이 사용할 만한 화장실이 없다. 알아서 해결하든 자신 없으면 자진해서 입사를 포기해라!”
 
내가 자립생활을 어렵게 꾸려나가며 공부할 때는 막연하지만 꿈과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졸업 후 그 꿈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보려고 나름대로 꿈틀거렸을 때 나는 중증장애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사회의 냉혹함과 차별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았다.
 
시민단체의 ‘무급노동’이 준 쓴 경험
 
이때 내 나이는 벌써 3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놀고먹고 있는 기초생활수급권자에 불과했다. 그때 무기력한 내 자신을 발견하며 슬럼프라는 것을 혹독하게 겪었다. 한동안 지속되었던 슬럼프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을 통해 시민단체에 무급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중증장애인 치고는 고학력이고 사회성이 좋다”라는 나만의 자존심과 자만심 때문에 작은 시민단체에서 적은 임금이나 무급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아예 배제해 왔었다. 그러나 그런 단체들은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고, 나 또한 소외된 계층이었으므로 더 이상 잘난 척만 하면서 나 자신과 현실을 원망하며 지낼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나만의 경험들이 시민단체에서 일한다면 보탬이 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날 자극했다.
 
그렇게 난 2~3년 정도 장애인을 위한 시민단체에서 100% 무급으로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배웠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중증장애를 가진 내가 그 속에서 협력하기엔 수많은 유리벽들이 가로 막았다.
 
“무급으로 함께 일하기엔 너무 좋고 고마운 존재지만, 막상 임금을 지불하기엔 뭔지 모르게 찝찝하고 아깝다”라는 동료의 속마음을 들어야 했다. 1년을 근무한 단체에서는 임금을 지불할 여유가 도저히 없다며 나의 활동보조시간 일부를 동료에게 명의를 돌려서 가사보조를 얼마만큼 포기하게 하는 대신 나의 임금으로 주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가고, 급기야 몸담고 있던 단체의 안 좋은 실상들을 깨닫게 될 때 쯤 난 동료들과 자주 부딪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일터를 떠났다.
 
와상장애인의 개인과외를 맡다
 
나는 곧바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지인의 소개로 한 와상장애인의 개인과외를 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방에만 누워 오로지 입으로 컴퓨터와 TV를 통해 세상과 소통해 오던 그 분은 생전 처음으로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외수업에는 정말 넘기 힘든 산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부딪쳤던 난관은 나의 학생이 세상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고, 많은 준비를 했지만 부딪쳐야 했던 문제들은 만만치 않았다. 수업에 필요한 기본적 학습을 위한 내용보다는 국어나 영어 단어 하나를 이해시키는데 시간을 너무 빼앗겼다. 처음 약속대로 기본적인 국어와 영어를 수업했지만 학습자는 공부에 별 의지가 없었고, 이해력도 무척 떨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이런 시간이 2, 3개월 흘렀을 때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학습자 부모님의 태도였다. 학생이 와상장애인이니 만큼 옆에는 항상 노모님이 지키고 계셨다. 이 분은 수업 시간 중 종종 참견을 하셨고, 나는 수업의 책임과 권한을 침해당한 듯해서 감정이 언짢았다. 그런데 몇 달 후에 학부모님은 날 따로 부르시더니, 나의 장애를 이유로 대며 “죄송하다”는 한마디로 나와의 인연을 정리하셨다.
 
난 20만원을 받으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서너 시간 과외수업을 했다. 물론 돈이 중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먼저 공부를 시작한 장애인이라는 동료애도 있었고, 그 동안 내가 제일 오래 해오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본 것도 야학자원교사 활동이 유일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에 많은 노력과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 분은 마치 “교사를 잘못 만나 학생의 실력이 늘지도 않고 돈만 허비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고는 “만약 과외교사가 비장애인이라면 아무래도 성미씨 보다는 훨씬 월등하지 않겠느냐”며 날 해고 했다.
 
그 뒤 나는 “두 번 다시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안 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며 삼사년을 흘려보냈다. 이렇게 나는 노동할 수 없는 현실에 또 한 번 부딪쳐야 했다.
 
‘일할 권리’ 가로막는 기초생활수급권
 
자립생활을 시작한 지 15년이 훌쩍 넘어가는 세월 동안 난 단 한 번도 떳떳한 경제활동을  한 적이 없다. 두세 번 시민단체에서 무급으로 출퇴근하고 이러저러한 알바들은 어느 정도 해보았다. 하지만 내가 처해 있는 기초생활수급권이라는 제도 앞에서 난 떳떳한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월급이나 시급을 받게 된다면 당장 내가 박탈당하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수급권자의 자격으로 입주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당장 나가야 하고 기초의료보호도 포기해야 한다. 내가 노동을 하는 순간 몸을 눕힐 수 있는 거처와 건강을 포기해야 한다.
 
매번 경험했던 것이지만 중증장애인 그중에서도 여성이 경제적 활동을 도모하기엔 이 사회에는 장벽이 너무 두텁고 높기만 한다. 난 분명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하지만 중증장애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사회에 끼어들지 못하고 겉돌고만 있다. 이러한 현실은 나 개인적인 문제일까? 그것들에 대한 결과물과 고민거리와 책임은 나 혼자만 껴안으며 책임지고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난 이러한 해답 없는 질문들을 수 없이 자문자답하며 오늘도 나의 노동을 꿈꾼다.

기사입력 : 201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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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em 12/11/05 [20:31]
글 잘 읽었습니다. 장애인의 노동여건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일을 시작하면 지원을 받지 못하다니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네요. 면피성으로 일자리를 내놓고 실질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사업장들이 많군요. 저도 저의 일상을 어떻게 장애인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숙이얌 12/11/13 [17:10]
"내가 노동을 하는 순간 몸을 눕힐 수 있는 거처와 건강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도네요...
토머스 12/11/14 [01:38]
성미씨가 꿈꾸는 노동이 실현될 수 있도록 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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