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그릇

[박푸른들의 사진 에세이] 컴퓨터가 포맷되다

박푸른들 2014-10-24

※ 농촌과 농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하며 살고 있는 20대 박푸른들의 농(農)적인 시선. [편집자 주]

 

오랜 시간 준비한 일을 마무리하던 찰나 컴퓨터가 고장 났다. 컴퓨터 디스크와 함께 그동안의 일이 날아갔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A/S 센터에 가면 복구해줄 거니까.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연히 내 컴퓨터는 나의 작업을 모두 기록해두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A/S 센터 기사는 디스크와 함께 모든 기록이 날아갔다고 말했다. 모든 기록. 두 눈으로 감상하기보다는 카메라 액정을 보며 찍은 사진들, 갈겨쓴 글들, 이것도 추억이라며 지우지 않았던 예전에 사귀던 사람과의 데이트 사진, 묵혀둔 여행 기록, 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하며 악착같이 모아둔 자료들… 모두.

 

포맷이 되어버린 컴퓨터를 들고 집에 오는 길. 잊고 싶지 않았지만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던, 그래서 모아두기만 했던 파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기억의 재료들이 사라져 아쉬웠지만, 한편 홀가분했다.

 

물론 어떻게 하면 인터넷에라도 남아있는 파일을 찾을까, 다음에는 파일을 날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동반했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보며 ‘정리를 해야 한다’는 숙제로부터의 해방감과 컴퓨터보다는 작지만 온전한 나의 기억그릇이 생겼다는 기쁨이 돋아났다.

 

▲  클라우드(디지털 콘텐츠 저장 시스템)에서 겨우 찾은 사진 중 하나. 2014-09-12. 강원도 홍천 메밀밭. 

 

기사입력 : 201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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