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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이는 낳을 수 있겠니?”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말하다
이희연   |   2015-01-14

몇 년 전, 사귀고 있던 사람이 불쑥 물었다.

“너, 애는 낳을 수 있겠냐? 네 몸으로 애를 낳으려면 뭔가 특수한 방법을 이용해야 하는 거 아냐?”

 

황당한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보니, 그 사람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자신은 장남이라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애를 낳을 수 없는 여자와는 결혼할 수 없으니 미리 물어보는 거라고 했다.

 

당시 그 사람과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니와 결혼은 꿈에도 생각을 안 하고 있던 시기라, 내 입장에서는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결국 그와의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이를 (정상적으로) 낳을 수 있냐’ 라는 것을 진지하게 연애의 전제 조건으로 보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듯도 하다. 나처럼 장애를 가진 그 사람 역시 그런 방식으로 집안에서 키워져 왔을 테니 말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거나 보다 나은 조건의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집안에 의무를 다하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저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 자리에서 욕이라도 퍼부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냐는 질문이 담고 있는 것

 

▲  우리 사회에서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는 얼만큼 보장되고 있을까. © 그림: 정은

사실 “애는 낳을 수 있겠냐?” 라는 질문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가부장적 사회 질서 속에서 여성의 역할과 위치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장애여성의 위치는 어떠한지. 또 장애여성에 대한 무지와 억압,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몰이해 등등 여러 가지 문제가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장애여성들이 살아가며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장애여성의 성적인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론화한 지는 이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장애여성들은 자신을 무성적 존재나 천사 같은 존재라고 왜곡해서 보는 이미지를 탈피하여, 한 사람으로서 혹은 한 여성으로서 성적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사회에 알렸다. 그 흐름은 지속되고 있고 많은 변화를 이루어내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장애여성의 권리에 대해 무지하고, 당사자로 하여금 주위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공공기관이나 병원 등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장애여성의 말을 듣기보다는 보호자를 찾으며, 당사자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성적 자기결정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부터 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하거나, 시설이나 가족 등에 의해 불임수술을 받게 되거나, 임신을 했을 때 강제로 임신중절시술을 받거나, 양육권을 포기하도록 강요 받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장애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선언적 규정’에 불과

 

우리 사회에서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는 어떻게, 혹은 얼만큼 보장되고 있을까. 장애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성과 임신, 피임, 출산, 양육에 대해 자기 결정권으로 존중 받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지난 달 8일 장애여성공감과 재단법인 동천이 <우생학, 낙태, 모성권, 자기결정권>이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연 것은, 우리 사회에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에 관한 논의가 시작됨을 알린 것이라고 본다.

 

이 자리에서 김용혁 변호사(재단법인 동천)는 법적 검토를 통해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지 분석, 보고하였다.

 

장애여성이 성생활과 피임, 임신, 출산 등에 관하여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는 헌법 10조를 통해 선언된 기본권이며,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통해 구체적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김용혁 변호사는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여성에게 임신을 결정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한 장애인차별금지법 28조 4항은 “선언적 규정”에 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한 전체 여성들을 대상으로 유사한 내용의 규정을 담고 있는 건강가족기본법 11조 역시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장애인거주시설을 비롯하여 사회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장애여성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폭력 역시 장애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  2014년 12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우생학, 낙태, 모성권, 자기결정권> 토론회. ©장애여성공감

 

한편, 장애여성공감 진경 활동가는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모성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장애여성운동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장애여성도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장애여성 모성보호 지원 체계를 만든 것은 중요한 성과이지만, 모성권만 강조하게 될 경우 성교육과 성관계, 결혼과 비혼, 피임과 임신, 낙태, 출산, 양육을 아우르는 재생산권 이슈가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경 활동가는 특히, 저출산 대책을 펴고 있는 국가의 인구 정책의 일환으로 장애여성의 모성권이 포섭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임신과 출산, 양육은 여성만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에, 장애여성의 재생산권 논의도 남성들을 포함하여 장애계 전체가 함께 고민하길 바란다고 당부하였다.

 

장애여성공감의 이번 토론회에서는 구체적인 대안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장애여성운동의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고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로서 의미가 있다.

 

‘선택권’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현실

 

필자의 지인 중에는 중증의 장애여성들이 있다. 결혼하지 않은 한 장애여성은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하고 임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헤어진 상태였고 임신 사실도 너무 늦게 알게 되어 열악한 조건에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피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그녀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덜컥 아이를 낳아 양육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무척이나 힘겨워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 한 명의 중증 장애여성은 비장애인 남성을 만나 결혼을 했다. 몇 년 후 생활이 안정되자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지려 하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만류하였다. 불임 수술을 받으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아이를 갖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며 지낸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다음은 둘 다 장애를 가진 부부의 경우이다. 이들 부부의 장애는 그다지 중증은 아니다. 하지만 생활 여건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다. 역시 주변에서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만류했다. 아내가 임신하게 되었을 때, 부부의 부모들은 낙태하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그래도 부부는 의지대로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탓에, 양육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결코 극단적인 상황들이 아니다. 내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장애여성은 임신의 과정이나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임신이나 출산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그 논리는 한결 같다. ‘네 몸도 못 가누면서’, ‘나중에 아이가 불행해진다’, ‘아이마저 장애인이 되면 어쩌려고.’ 개중에는 ‘장애인 딸 하나 깨끗하게 못 지켰다고 남들이 네 부모 욕한다’는 식의 언어 폭력을 당할 때도 있다.

 

출산을 위해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에도, 의료진 역시 장애여성들에게 임신은 ‘위험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큰 병원에 갈 것을 권하면서 진료를 은근히 거부하기도 하며, 자연분만을 피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강권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회냐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비혼(非婚)인 나는 아직까지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도 내 의사를 말해왔고, 앞으로 애인이 될 사람에게도 확실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장애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보장된다면, 나의 생각은 바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병원의 시설과 비용, 양육 보조 등의 지원 말이다.

 

성관계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임신을 할 것인가 피임을 할 것인가, 출산을 해서 양육을 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장애여성들이 어떤 책임이나 의무나 강요나 희생의 굴레에 놓이지 않고 온전히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 날을 위해, 어렵사리 시작된 장애여성의 재생산 권리에 대한 논의가 우리 사회에 불 지펴지기를 바란다.

기사입력 : 201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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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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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1106 15/01/15 [00:36]
유전성 질환을 가진 중증장애여성으로 참 다양한 이유로 유전이 되냐, 종손인데 아이도 안 낳으면 어떡하란거냐, 집안도 다 병에 장애인인데 너까지 애를 낳으면 어쩌란거냐, 아이를 가질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는데 그 고민들을 잘 짚은 자리, 참 위로가 되고 저도 제 문제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고 정리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오미 15/01/19 [09:11]
 중증 장애인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입장에서 굉장히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 '재생산'이라는 표현이 좀 걸림이 있더라고요. 
 '생산-재생산'의 관점은 엄연히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것인데, 자본적 관점에서는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하여 생산력이 떨어진다고 해석합니다. 실질적인 속도의 차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권리' 로써의 출산을 이야기 하는데, 과연 자본적 '생산'의 표현으로 논해질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자본적 사회에서 온 차별을 논하면서, 정작 자신이 출산할 권리를 '생산'적 측면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저 표현은 과연 여성들이 쓰기 시작한 표현일까. 남성적 사고의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peppermint 15/01/19 [09:22]
위엣분이 쓰신 걸 보니까 흥미롭기도 하고 궁금하네요. 재생산권이란 말이 장애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맞지 않은 것 같다면 어떤 말이 있을까요? 재생산권은 출산권만 해당하는 게 아니잖아요. 새로운 용어가 있으면 알고 싶어요. 
푸훗 15/01/19 [20:09]
본문도 나오미님의 댓글도 화두를 던져주네요. 재생산권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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