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화장실과 분홍 원피스

<이 언니의 귀촌> 전북 남원의 대안학교 교사 혜선(상)

혜선 2015-06-02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  "나의 직업은 대안학교 교사다." 학교 목공 시간에 어설픈 톱질을 하는 모습.   © 혜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이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혼자서 이곳에 왔고 올해로 3년째 살고 있다.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지금 나의 직업은 대안학교 교사다. 학교에서 백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아 생활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도시에 살다가 귀촌을 해서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면, 읍이나 면 지역의 일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급여가 이정도 아닐까 싶다. 그 일자리는 아마도 여성농업인센터나 여성농민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지역아동센터나 공부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마을 카페나 마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농사를 짓는다면 월 백만원 가량의 수입을 상상하는 건 힘들다. 흔히 말하는 자급자족, 내가 먹고 살 것을 길러내는 일도 만만치 않다. 대신 시골에서 살아간다면 도시에서보다 소비의 유혹은 적을 것이다.

 

‘귀농귀촌의 메카’ 산내에서 살아가는 것

 

내가 살고 있는 산내면은 귀농귀촌의 메카라고 불리는 곳이라 한다. 생명평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지역자립 생태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온 실상사가 있고, 실상사 귀농학교가 있었다. 그 귀농학교를 통해 많은 귀농귀촌인이 나왔다고 들었다.

 

지금은 산내에서 귀농학교가 열리지는 않지만 외지인의 드나듦이 여전히 활발하다. 당연히 집값은 비싸고, 매매와 임대를 위해 나오는 집도 많지 않다.

 

▲  학교 밭에서 몸빼 입고 밭일하는 모습. 비가 살짝 내려서 비닐을 뜯어 머리에 썼다.  © 혜선

총 인구는 2천명 정도고 귀농귀촌인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귀농귀촌의 주축을 이루는 사람들은 40~50대의 결혼한 사람들인데, 가족 단위로 내려와 집을 짓고 텃밭을 꾸리고 아이를 지역 어린이집과 학교에 보내고, 마을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한다. 가족 단위로 내려온 부부들의 경우에 둘 중 한쪽이 교사 등의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목수 등의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산내면의 분위기는 아주 가족 중심적이거나 가부장적이지만은 않은 편이다. 나의 경우,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장도 군단위의 시골인데, 그곳에서보다 여기에서 훨씬 ‘시집가라’라는 말을 덜 듣는다. 나는 산내에서는 비혼여성들의 삶이 다른 시골지역에 비해서 존중받는 편이라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이곳에 와서 아이를 낳고 산다면 더 재밌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이 20대나 30대의 결혼하지 않는 여성이라면, 산내에서 살아가는 게 꼭 재밌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당신 또래의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많지 않은 곳이기에.

 

이곳은 ‘산내 특별시’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사회문화적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이고, 마을에 있는 동아리만도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나는 산내에서 희곡을 비롯한 책을 함께 읽는 ‘낭만세상’(낭독으로 만나는 세상)이라는 모임과 <지글스>(지리산에서 글쓰는 여자들)라는 잡지를 만드는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모임 구성원들은 모두 여성들이고, ‘어디서 이렇게 멋진 여성들이 이토록 깊은 산속에 모여든 걸까!’ 싶을 만큼 함께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모임에서 거의 나만이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고 거기에서 오는 외로움과 허전함이 있기도 하다.

 

지리산 자락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곳에 오기 전, 여행 다닐 때 여기 들렀다 찍은 사진. ©혜선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계기는, 이전의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20대와 30대는 도시와 고향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냈다. 내 직업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그 직업들 사이에 큰 일관성 같은 것도 없다. 지금은 대안학교 교사로 살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내 인생인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것.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일은 영어학원 강사였다.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독립단편영화를 만들었다. 돈이 모이면 작품을 찍고, 작품이 망하고, 또 돈을 모으고 작품을 찍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니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게 영화는 내 결핍에서 나온 욕망의 덩어리인 것 같았고, 그걸 채우기 위해 돈을 벌려고 사교육계에 종사하면서 아이들과 싸우는 일이 싫었다.

 

점점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일이 많아졌다. 난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마침 영어교사를 구하던 지리산에 있는 한 대안학교에 내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학교는 나를 받아주었다.

 

지리산과 산내는 나의 고향에서 차로 한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나는 20대 때부터 마음이 힘들 때면 별 이유 없이 실상사에 다녀오곤 했다. 그곳의 풍경이 특별히 아름답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그 절에 가면 ‘이라크에 파병하지 마시오’라거나 ‘지리산댐 반대’같은 현수막도 걸려있고 한 게 좋았다.

 

마지막으로 학원 생활을 할 때 지리산에 자주 갔다. 혼자 둘레길을 걸을 때면 겹겹이 펼쳐진 지리산이 나를 일으켜주는 기분이 들었다. 구례 어딘가 버스정류장에 혼자 앉아 휴대폰에 일기를 쓰면서, 그리고 다른 여행자들이 다이어리를 쓰는 것을 보면서, 그 순간 비로소 내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같은 책도 읽었고 구례 지역에서 운영되었던 <지리산 닷컴>같은 사이트도 자주 들어갔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막연히 지리산 자락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었고, 그 곳에서 느리고 천천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대안학교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생태화장실의 똥을 퍼내는 영어교사가 되어

 

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시골출신이었기에 시골에 사는 것이 크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달랐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생태화장실에 적응하는 데만도 몇 달이 걸렸다.

 

▲ 숙소의 똥을 푼 날, 퇴비를 푸대자루에 옮겨 담고 밭으로 나르기 직전에 기념으로 찍은 사진.  © 혜선

 

학교에서는 생태화장실에서 나오는 똥을 발효시켜 텃밭의 퇴비로 쓴다. 그리고 그 똥을 아이들이 직접 푼다. 당연히 교사도 함께 해야 한다. 내겐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또래의 젊은 여자 선생님들이 묵묵히 그 일을 해내는 것을 보았다. 놀라웠다.

 

머지않아 나 역시 퇴비 나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숙소 생태화장실의 똥도 내 손으로 직접 퍼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숙소 화장실 똥을 퍼낸 일을 올해 초에 나왔던 <지글스> 겨울호에 썼다. 올봄 우연히 만난 산내에 새로 오신 분이 내 글을 보고 생태 화장실 똥을 퍼낼 용기가 생겼다고 했을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생태화장실이 아닌 곳이 훨씬 편하다. 그러나 지금은 수세식 화장실에서 물을 내릴 때면, ‘도시의 이 많은 똥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똥은 톱밥같은 발효재와 섞이면 시간이 지나면 흙과 똑같은 모습이 된다. 그것은 식물이 자라는데 꼭 필요하다. 거름이 없으면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 식물이 자라지 못하면 우리가 밥을 먹을 수가 없다.

 

▲  산에 들어와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분홍색 원피스. 이걸 입고 <지글스> 표지 사진도 찍었다.  © 혜선

나는 이렇게 조금씩 산 속에서의 생태적인 생활에 적응해 갔다. 우리 학교는 우리 먹을 것은 스스로 길러내서 수확해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학교에 있을 때면 밭 만들기, 김매기 등의 농사일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산에 부엽토를 긁으러 간다든가, 솔방울을 주우러 간다든가, 쥐를 잡는다든가 등의 다양한 학교 살림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이런 일들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수업의 일부이기도 하다.

 

난 영어교사로 이곳에 왔지만 실제로 교실수업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스타일이나 패션 같은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활동하기에 편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학교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몸뻬나 개량한복 같은 옷을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입고 다녔다.

 

산내에 산지 몇 달이 지났을 때 난 시장에서 몸뻬를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산내에 들어오기 전에 입고 다녔던 원피스와 구두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가끔씩 예쁜 옷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럴 때면 산 속에서도 분홍 원피스를 입고 출근했다. 일을 할 때는 다시 몸뻬로 갈아입었다.

기사입력 : 201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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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I 15/06/03 [14:53]
농사로만 돈을 벌지 않고도 시골에서 생활하는 얘기, 많이 들려주세요~ 산 속에서 원피스 입고 출근했다가 다시 몸뻬 갈아입은 얘기, 눈에 그려지니까 웃음이 나네요. ㅎㅎ 시골에서 살면 아무래도 도시에 살면서 안해봤던 일들을 하게되니까 무기력해지지 않을 것 같아요. 
하늘 15/06/04 [18:24]
가슴이 청명해지는 기사네요 잘 보았어요
나르시스트 15/06/09 [13:49]
정말 궁금한 얘기를 들려주시는군요. 영화를 보면 음... 겉모습은 나와도 뒷 배경이 보이지 않으니, 궁금했는데, 덕분에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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