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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방은 서울로 떠나고
김담의 연재소설 <소향전> 113화
김담   |   2015-09-30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 ‘씨받이’라고 불렸던 대리모 소향의 일대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주]

 

형평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가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장서방은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시작된 달음질을 마치고자 태섭의 불편한 얼굴을 보면서도, 또 눈알을 밑으로 굴리면서 방바닥을 보면서도 장서방의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듣는 큰아지매의 경계심을 느끼는 가운데 어렵사리 말을 마쳤다. 이제는 그들의 반응에 따라 혹은 결정에 따라 자신이 대처하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가라면 보따리 싸서 또 길을 나서면 될 것이고 대안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또는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비록 자신이 득 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에는 다소나마 활력이 돌 것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낮추어 기다린다.

 

태섭은 어안이 벙벙하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라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는지 그저 입을 허 벌리고 마누라만 힐끗힐끗 쳐다보며 무슨 응원을 구하려는 듯하다. 큰아지매 역시 저 말들이 머슴 사는 사람 입에는 나오는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생각 깊은 큰아지매의 마음에는 이미 맞는 소리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여 내놓을만한 결단력이나 지식이나 이론의 무장이었다. 큰아지매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일종의 의사를 태섭에게 전달한다. 바로 동의의 의사다.

 

-지금 내보고 마을을 먹여 살리라 카나? 자네?-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한쪽 팔꿈치가 무릎에 닿는 삐딱한 자세로 장서방을 향해 묻는 태섭에게 장서방은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방바닥만 본다.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찾도록 여유를 주자는 뜻도 있지만 또 들어맞는 대답을 할 시간도 필요해서다.

-내 집에 머슴 사는 기 아이고 자네는 동네사람들 머슴을 사나? 하는 말이 전부 집 거덜 낼 말뿐이네? 안글라?- 하고 마누라를 쳐다보자 큰아지매는 들었음에도 역시 고개를 돌려 아무 대꾸가 없다.

-그럼 저는 이만- 하고 느닷없이 장서방이 자리를 조용히 일어선다.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득이 된다고 믿고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선 후 돌아서 나온다. 건넌방에 세 사람이 들어간 것을 알고 있던 소향이 저녁상을 어떻게 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장서방이 나오는 것을 보자 마루 끝으로 가서 묻는다.

-큰아지매예, 겸상을 들일까예?-

장서방이 나간 후 두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느라 소향의 소리도 뒷전이다. 마루를 벗어나기 전 크게 기지개를 킨 장서방은 댓돌 옆에서 건넌방 대답을 기다리는 소향을 보고 -소향아, 부엌 바닥도 좋으니 우선 나부터 저녁 좀 주지. 배가 많이 고프다- 하고 빙긋이 웃자 대답 없는 건넌방이 미운 듯한 눈짓을 한 소향은 금방 웃는 낯으로 장서방을 향해 -예, 안 그래도 차리났십니더- 하고 두 사람은 정기로 들어가 흙바닥에 엉거주춤 앉아 수저를 든다.

 

-소향아-

입에 한가득 밥을 우겨넣은 장서방이 된장국을 뜨면서 부른다.

짚단을 엉덩이에 깔고 부른 배를 앞으로 내민 소향은 밥 먹기도 힘든 자세라 한손으로는 뒷전을 짚고 겨우 나머지 한 손으로만 숟가락질을 한다.

-나는 이제 갈 때가 된 성싶다. 농사도 없고 할 일도 없구나. 이제는- 하면서 그저 밥만 입으로 들인다.

소향이 놀란다. 금방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장서방의 나직한 목소리만으로도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짭니꺼?-

숟가락을 들고 장서방의 얼굴을 쳐다보며 하는 말인데 밑도 끝도 없이 그저 우짭니꺼다 한다. 소향이 어찌 할 건지 아니면 장서방이 어떻게 살 것인지 아니면 이일을 어찌  할 것인지 정확히는 그것들 전부를 모아서 한 소리다.

장서방도 소향도 더 이상의 말을 주고받지 못하고 밥을 다 먹고 일어서서 정기를 나간다. 밥을 먹지도 않고 여전히 무거운 몸을 땅바닥에 붙인 채 뒷짐을 지고 있는 소향은 붙잡을 수도 없는, 어디로 언제 가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러는 중에 나직한 목소리가 건넌방에서 들린다. 겸상을 들이라고.

 

장서방이 나간 후 태섭은 무슨 응원의 말이라도 마누라의 입에서 나올 줄 기대했던 자신이 어색하여 헛기침을 몇 번 내뱉은 후 마누라가 싫어하든 말든 담배를 꺼내 물고 생각에 잠기며 마누라를 본다. 심각함을 인정해서인지 담배에 대해 거부반응도 보이지 않고 생각에 잠겼던 마누라가 치마를 고쳐 모으며 -올해 농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심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장서방의 말이 과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 한편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영감 생각은 어떠신지- 라고 묻는다.

 

태섭은 마누라의 입에서 장서방의 생각에 동의를 한다는 것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내심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옳은 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지주들이 자신들의 살점은 하나도 떼이지 않고 그저 소작들만 쥐어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뿐이었다. 하지만 신흥땅도 한 점 팔아서 날렸고 또 오늘 장관이나 지사가 모인 자리에서 덜컥 채시중이 내놓겠다고 한 돈만큼은 적어도 자신도 내 놓아야 할 판이고 또 얼마 남지 않은 참의원선거에도 돈뭉치가 계속 들어가야 할 판인데…. 농사는 폐농이 되어 들어올 소작은 하나도 없고 그 와중에 장서방이란 놈이 무슨 혜안처럼 내놓은 송아지 타령이 또 뭉칫돈 들어가야 할 것이라 마음이 답답하다.

 

-참 내도 모리겠소- 하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는데 소향이 방문을 열고 상을 들이는데 끙끙거리는 태도다. 태섭은 일어나서 상을 받고도 싶지만 그냥 앉아만 있고 마누라도 그저 엉덩이만 달싹할 뿐이다.

-장씨아저씨가- 하고 방문을 닫지도 않고 우물거리자 큰아지매가 상을 당기다 말고 -무슨 말이냐? 장서방이 뭐?- 하자, 소향은 -가신답니더- 하고 장서방의 방 쪽을 돌아보며 소향이 문밖에서 어설픈 얼굴을 하자 태섭이 큰소리로 되묻는다.

-가다이? 오델?-

소향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우물거리는 사이 이미 무슨 말인지 알아챈 큰아지매가 태섭이 쪽 숟가락을 가지런히 챙기면서 소향에게 이른다.

-장서방 들어오라 해라- 하고 자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숟가락을 들고 물그릇에 담근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소향이 달음질하여 장서방 방앞으로 가서 부른다.

-아저씨예-

희미한 호롱불을 그림자가 막는 듯하더니 방문이 열리는데 이미 짐을 싸고 있는 장서방을 본 소향은 울상이다. 가죽으로 된 큼직한 가방이 열려있고 그 속에 옷가지들이 담겨있다.

-아저씨, 건넌방에서 좀 오시랍니더-

 

그러나 장서방의 얼굴은 너무도 태연하다. 이미 세상살이에 간다는 것이나 온다는 것이나 또는 있다는 것 없다는 것에 초연한 장서방이다. 그러나 소향이를 난간에 놓고 자신이 그냥 떠난다는 사실은 마음이 편치는 않다.

-그래? 알았다. 내, 이것만 정리하고 가마- 하고 방바닥에 널린 것들을 주섬주섬 가죽가방 속으로 밀어넣자 대뜸 소향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장서방의 팔을 붙잡고 제지하며 -지금예. 이거는 놔두고예- 하고 거의 울상을 짓는다.

그러는 소향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장서방은 아무 말도 더하지 않고 그냥 건넌방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내고 부른다.

-장서방입니다-

-들어오게-

큰아지매의 말을 듣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데도 둘은 밥을 먹고 있다. 대수롭게 여기자는 두 사람의 표현이다. 장서방이 먼저 할 말은 없다. 부른 것이 그들이기에 그저 기다릴 뿐. 수저를 먼저 놓은 것이 큰아지매고 물을 찔끔 마신 후 -소향이 그러는데 간다고 하는데 어디를?- 묻는 마누라의 말에 동조하듯 태섭이 장서방의 얼굴을 빤히 본다.

 

장서방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후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소작도 없는 농사에 머슴이 할 일 없이 밥만 축내는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가려고 합니다. 좀전에 제가 드린 말씀은 그냥 흘려주십시오. 딱한 동네사람들을 보다 보니 우매한 생각이 들어서 우려를 범했습니다-

간략하지만 초점이 뚜렷한 말이다.

태섭은 마누라의 입만 보고 있다. 마누라는 그런 태섭을 의식하는지 못하는지 아랑곳없이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한 후

-농사는 한 해로 끝나는 것이 아닌데 그리 쉽게 갈 수 있는가? 또 한 해 농사를 폐농했다고 종가에 자네 할 일이 그리도 없는가? 아무리 그렇다 쳐도 자네가 밥 축낸다고 우리가 눈치 줄 일은 없을 테니 그리 알고…- 말을 분명히 맺지 않는 것이 무슨 할 말이 남아있는 눈치이다.

 

태섭이 끼어든다.

-아까 전에… 자네가 한 말 말이다. 그 송아지 얘기… 그거 만일에 소작들이 잘 키우지 못하기라도 하모, 죽기라도 하모 그땐 우짜지?-

분명 둘이 그 일로 인해 무슨 말을 주고받았음에 틀림없다. 자신의 생각을 전부가 아니면 일부라도 고려했다는 것이므로 장서방은 떳떳하게 말한다.

-그런 일들이야 말로 다 하늘이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송아지를 키우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최선을 다 할 것인데 어찌 하늘이 하는 일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태섭은 긴 한숨을 내쉰다. 그것조차도 자신의 돈을 보험에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장서방의 말이다.

큰아지매는 태섭의 속도 모른 채 -자네가 내놓은 송아지 얘기는 좀 더 알아보게. 동네사람들 몇 명이 원하는지 또 시세는 어떤지-

태섭은 마누라의 얼굴을 힐끗 보며 속으로는 그 돈을 또 마련해야 하나 하고 걱정이 앞선다. 이미 장서방의 발목을 잡아 눌렀다는 것에 모두들 무언의 동의를 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참에 장서방은 미루어 온 서울 출입을 하고 싶다.

-기왕 싼 가방이라 특별히 시키실 일이 없으시면 이참에 사나흘 말미를 주시면 서울을 한번 다녀오고 싶습니다만-

그것이 무엇 그리 큰일이 아니다 싶은 태섭은 또 돈을 마련하거나 궁리할 시간도 필요하니 선뜻 허락한다.

 

소향은 방문 앞에서 상도 내가야 하고 무엇보다도 장씨아저씨가 정말로 이집을 떠날까 하는 걱정에 문을 열어젖히고 오고가는 말이라도 듣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데 장서방이 문을 열고 나오려다 방문 앞에 있는 소향을 보고 웃으면서 -내가 상 내다주마- 하고 밥상을 번쩍 들고 정기로 성큼성큼 가자 뒤에 있는 소향은 장서방의 얼굴에 있던 미소를 떠올리며 무언가 다행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정기로 따라간다.

-아자씨예?- 하고 장서방의 얼굴을 보며 무슨 대답인가를 기다리자 씩 웃는 장서방은 소향의 마음을 훤히 보고 있는 듯

-소향아, 우리 또 한솥밥 먹게 됐다- 하고 웃는다.

소향도 그저 웃는다.

 

광수에미가 제법 이른 아침부터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정기로 간다. 요즘 부쩍 종가 출입이 잦은 그녀는 다 이유가 있다. 분가하면 그저 돈방석에 앉아 비단옷으로 몸을 칭칭 감을 줄만 알았는데 첫해 농사라는 것이 몽땅 바람에 날아가고 남은 것이라고는 밭에 있는 고구마  뿐이니 살림살이하며 아이들 먹이고 학교 보내는데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분위기를 봐서 아쉬운 소리라도 해야 할 판인데 기회가 영 오질 않아서 몸이 무거운 소향이를 돕는다는 핑계로 들락거린다. 소향이 작은 소쿠리 속에 삼베를 깔고 주먹밥을 뭉쳐 장아찌와 함께 싸는 것을 보고 -그기 뭐꼬?- 하고 묻는다.

 

-장씨아저씨가 서울 간다고 케서예. 밴또 싸는 중이라예- 하며 삼베를 다독거리자 광수에미는 우악스런 손으로 소향의 소쿠리를 빼앗아 들고

-야,야, 길 떠나는 사람한테 밴또 싼다고 카민서 대소쿠리가 뭐꼬? 우리 집에 광수가 들고댕기는 밴또 있다. 내 그거 갖다주꾸마. 쿤데? 장씨가 서울을 가? 와?-

-지야 모리지예. 밴또가 정말로 있습니꺼?-

-농사 땜에 다들 정신이 없는데… 서울은 와가노? 그래, 내 갖고 오마- 하고 육중한 몸을 흔들어대며 대문을 벗어나는데 장서방이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정기로 들어선다. 당고바지에 검은 구두를 신고 위에는 군복을 차려입었다. 어느 것 하나 어울리는 것이 없지만 개의치 않는 장서방의 호기가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만든다.

-내 없는 동안 조심해라. 무거운 것 들지 말고. 알았지? 물은 어젯밤에 들여다 놓았으니 한 사나흘은 쓸 거다. 해봐야 한 사나흘 걸릴 테니- 하고 휘 둘러본다. 소향이를 편하게 하기 위해 어젯밤에 장작도 충분히 정기에 들여놓고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물지게도 여러 번 져 날랐다.

 

-서울 간다꼬예?-

언제 들어섰는지 광수에미가 밴또 도시락을 소향에게 내밀며 장서방을 보고 말한다.

-예, 추석에도 보지 못한 친척 분들한테 인사도 할 겸 한 사나흘 다녀올까 합니다. 요새 통 광수아버지도 못 봤네요. 뭐하십니까?-

인사로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요 며칠 사이에 얼굴을 맞댄 기억이 없다.

-할 일이 있으모 울매나 좋을긴교? 어제도 술에 취해 지금도 자고 있을 끼고-

입을 삐쭉거리며 태광이를 나무란다.

소향이 광수에미가 가져다준 도시락에 주먹밥을 담아 장서방에게 내밀며 -이거예. 가다가 잡수이소- 한다.

장서방은 웃으며 소향의 고마운 마음을 거절하지는 않지만 사실 손에 들고 다니는 음식이 귀찮다.

-국수나 한 그릇 사먹으면 될 일을… 성가시게- 한다.

그 말을 들은 광수에미는 -먼길 가는데 국수 가지고 됩니꺼? 배가 금방 꺼지는데. 밥을 잡사야지. 쿤데 서울 가시모 오델 갑니꺼?-

장서방은 속으로 서울 어디라면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왜 묻는지가 궁금하다.

-왜요?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되묻는다.

육중한 몸을 옆으로 꼬는 듯하더니 광수에미는 안방에 들릴까 조심하며 -서울에는 동동구리무 말고 더 좋은 구리무가 있다 캅디더. 얼굴을 희게 하고 주름도 펴주고 칸다 카던데- 라고 말을 흐린다.

여름 내내 농사에 그을린 얼굴이 폐농한 마당에 갑자기 왜 관심거리인지 장서방은 속으로 우습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런 것이 있다고 합디까? 제가 한번 들러보지요. 뭐- 하고 성큼 걸어서 정기를 나간다.

기사입력 :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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