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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보낸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케이   |   2016-10-20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세요. -편집자 주

 

▶ 영화 <다가오는 것들>(미아 한센-러브 연출, 이자벨 위페르 주연) 

 

나이가 들고 생활이 안정될수록 인간은 변화를 거부하며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다가오는 것들>(미아 한센-러브 연출, 프랑스)은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던 나탈리(이자벨 위뻬르)가 60대에 이르러 또 한 차례 인생의 폭풍우를 맞이하고 다시 균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삶에 항상성은 없다

 

영화 초반 나탈리의 일상은 꽤 안정된 상태다. 남편 하인츠는 크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탈리와 편안한 관계를 유지한다. 나탈리의 엄마는 불안증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그녀를 호출하곤 한다. 하지만 나탈리는 엄마의 지나친 돌봄 요구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탈리는 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명망 있는 철학 교사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다.

 

이토록 균형 잡힌 나탈리의 삶에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25년을 함께 해 온 남편은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며 이혼을 선언하고, 유약한 상태로 삶을 버티던 엄마는 죽음의 그림자를 따라가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교과서 집필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는 소식까지 접하며, 그녀는 삶에 항상성은 없다는 진실을 몸소 겪게 된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남편의 고백에 나탈리는 “왜 그걸 나한테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라고 응답한다. 나름의 균형을 맞추며 굴러가는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아픈 엄마를 돌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위태로운 상태나마 엄마의 삶이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요양원 생활이지만 나탈리에게는 찾아가 돌볼, 자신의 자리였다.

 

▶ 미아 한센-러브 연출, 이자벨 위페르 주연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 컷.

 

노년,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

 

나탈리는 치명적인 변화 앞에서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만 혼자 걷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다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자벨 위뻬르의 연기는 감정의 세세한 결을 온전히 살려낸다. 나탈리의 일상은 여전하다. 철학책 읽는 일을 멈추지 않으며, 제자들과의 소통도 이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던 중 아끼는 제자 파비앵이 산골에서 친구들과 함께 농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탈리는 그의 공동체를 방문한다.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글과 삶을 통해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는 파비앵에게 나탈리는 보수적인 중산층 엘리트로 비친다. 그녀에게도 공산주의자로 살며 당시 소련까지 다녀왔던 뜨거운 시절이 있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세월이다. 나탈리는 급진성을 논하기에 자신은 너무 늙었다며 변화를 인정한다.

 

삶의 근간을 흔들지 않을 만큼만 세상에 개입하게 된 노년기의 나탈리. 그녀는 더 이상 혁명을 바라지 않으며 그보다 훨씬 수수한 목표를 가지고 일상을 꾸려간다고 말한다. 뜨거웠던 이상은 생활 속에서 정련되며 차가워진다. 나탈리는 다시 한 번 지나가버린 것을 마주하지만 그 시절의 자신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 미아 한센-러브 연출, 이자벨 위페르 주연 영화 <다가오는 것들> 포스터 이미지 중에서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한 법

 

나탈리는 20년 동안 변함없이 휴가를 보냈던 브르타뉴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나보내고, 두 사람 몫의 책들로 빼곡했던 책장에서 남편 책이 덜어져 듬성해져버린 책장을 마주한다. 엄마 장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하던 엄마 때문에 철학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아이들은 장성해 품을 떠나고, 평생 사랑해줄 줄 알았던 남편은 다른 사람에게 가고, 엄마의 죽음까지 닥친 상실의 순간을 그녀는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로 해석한다. 하지만 온전한 자유도, 진정한 행복과 진리도 인간의 이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나탈리는 ‘온전한 자유’를 부둥켜안은 채 지나간 것들을 떠나보내며 혼자 눈물 흘린다.

 

인간이 이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현할 수 있어서라기보다 현실과 이상의 관계를 견주어보는 과정에서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나탈리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알랭의 <행복론>을 인용하며,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이고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한 법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은 그것이 불완전함을 알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다.

 

인생은 살아온 방향이라고 해서 계속 같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자의와는 상관없이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게도 한다. 이상은커녕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도 않는 인생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떠나보내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맞이하는 나탈리의 모습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사회와 관계하며 살아가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기사입력 : 20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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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16/10/24 [10:11]
영화감상문 잘 읽었습니다. 저도 그 영화를 보았기에, 독자의견을 통해 제가 인상깊었던 부분도 적어보고자 합니다. / 주인공 나탈리에게 제일 힘든 변화는 평생 자신만을 사랑할 줄 알았던 남편의 변심과 남편과의 별거이지요. 이를 놓고 그는 제자에게, 많은 추억이 담긴 부르타뉴 별장을 가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쉽다고 말합니다. 그 별장은 남편이 상속받은 재산이기에 자신이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남편과 마지막으로 그 별장에 가서 수영을 즐긴 뒤 나탈리는 별장에 둔 자신의 옷을 챙깁니다. 남편이 앞으로 당신이 계속 이 별장을 사용할 줄 알았다고 말하자, 나탈리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구냐'고 화를 냅니다. / 나중에 크리스마스 때 남편이 와서 은근히 자기도 자녀들과 함께 하는 저녁 만찬에 끼고 싶어하지만 나탈리는 남편을 단호하게 쫓아보냅니다. / 한편, 많이 늙어(80-90세 정도?) 외로움과 신체적 허약함에 시달리는 어머니는 나탈리에게 함께 살면 안되냐고 사정을 합니다. 나탈리는 남편때문에 안된다며 단호하게 거절하고, 어머니가 정말 가기 싫어하던 요양원에 보내지요. / 크리스마스날 자녀들과 저녁 만찬을 즐길 때, 손녀 아기가 울자, 자녀들에게는 편히 밥을 먹으라고 하면서, 자신은 기꺼이 옆방에서 손녀를 안고 얼릅니다. / 이런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나탈리가 분별력과 권력을 갖고 자신의 생활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변화들을 콘트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8세대로 젊은 시절 급진주의에 접했던 나탈리지만 자신의 안정된 생활과 자유를 흔들만한 변화를 들여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이 나이가 가진 성격일까요? 이 영화는 그런 캐릭터와 나이를 연결시켜 놓은 듯 합니다. 사실 나탈리 남편이 나탈리에게 함께 살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털어놓는 것도, 이를 눈치챈 딸이 태도를 분명히 하시라고 조언한 결과입니다. 딸의 채근이 없었다면, 어영부영 모르고 같이 오래 살았을 수도 있겠지요. 또 나탈리에게 자신이 안정된 생활을 구가하고 있는 계급적 토대를 계속 일깨워주는 것도 그의 젊은 제자입니다. 이 젊은 제자는 임대료 비싼 파리를 떠나 알프스 산자락 아래 집을 빌려 마음맞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당나귀도 키우고, 글도 쓰지요. 제가 나탈리에게 제일 부러운 건 이런 제자더라구요. 자신이 떠나온 20대의 생각과 삶을 만나게 해주고,  지금 자신의 삶에 활기를 제공해주는 존재이지요. 어쨌든 나탈리는 여러모로 부자입니다^^.  / 오히려 현실적인 걱정을 던져주는 인물은 나탈리의 어머니지요. 분별력 없는 노인이 되고, 혹은 분별력을 자식을 비롯해 주변인으로부터 의심받고, 또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거처를 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질 때까지 살게 되면 얼마나 참담할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또 외로워도 어쨌든 몸과 마음과 또 주변을 콘트롤하며 담담히 살아가는 나탈리의 모습을 감독은 큰 애정을 담아 그려낸 듯합니다. 30대 중반의 감독이 자신의 엄마를 모델로하여 만들었다고도 하네요. 그러나 나탈리가 확보한 안정성이 더 큰 사회경제적 철학적 실존적 동요 속에 자리한 것이라는 점이 좀 더 부각되었다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긴 감독은 여러 장면을 통해 나름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도 같습니다. 나탈리가 단호하게 잘라내고 맞섰던 여러 가지가 제 머리 속에 들어와 있으니 말입니다.  프랑스 사회의 여러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재미도 쏠쏠한 영화입니다. 
오리 16/10/24 [10:30]
위의 글은 제가 인상깊었던 것을 중심으로 쓴 것이고,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고양이 판도라이지요. 고양이 판도라는 주인공 나탈리의 엄마가 10년 이상 집에서 길렀던 고양이이고,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탈리가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지요. 나탈리는 이 고양이를 데리고 제자가 사는 곳으로 여행을 하는데, 고양이가 그 집에서 잠깐 틈을 타 숲으로 달아납니다. 나탈리는 오랫동안 집에서 살아 야생본능이 없어졌을텐데 하며 밤새 걱정을 하지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판도라는 쥐를 잡아 돌아옵니다. 남편,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진 나탈리와 새로운 환경을 접했던 판도라의 모습이 겹쳐지는 장면입니다. 판도라에게 야생성이 돌아왔던 것처럼, 앞으로 나탈리의 삶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판도라는 결국 제자가 사는 알프스 산자락에서 지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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