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세요.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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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 생활이 안정될수록 인간은 변화를 거부하며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다가오는 것들>(미아 한센-러브 연출, 프랑스)은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던 나탈리(이자벨 위뻬르)가 60대에 이르러 또 한 차례 인생의 폭풍우를 맞이하고 다시 균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삶에 항상성은 없다
영화 초반 나탈리의 일상은 꽤 안정된 상태다. 남편 하인츠는 크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탈리와 편안한 관계를 유지한다. 나탈리의 엄마는 불안증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그녀를 호출하곤 한다. 하지만 나탈리는 엄마의 지나친 돌봄 요구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탈리는 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명망 있는 철학 교사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다.
이토록 균형 잡힌 나탈리의 삶에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25년을 함께 해 온 남편은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며 이혼을 선언하고, 유약한 상태로 삶을 버티던 엄마는 죽음의 그림자를 따라가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교과서 집필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는 소식까지 접하며, 그녀는 삶에 항상성은 없다는 진실을 몸소 겪게 된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남편의 고백에 나탈리는 “왜 그걸 나한테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라고 응답한다. 나름의 균형을 맞추며 굴러가는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아픈 엄마를 돌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위태로운 상태나마 엄마의 삶이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요양원 생활이지만 나탈리에게는 찾아가 돌볼, 자신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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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
나탈리는 치명적인 변화 앞에서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만 혼자 걷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다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자벨 위뻬르의 연기는 감정의 세세한 결을 온전히 살려낸다. 나탈리의 일상은 여전하다. 철학책 읽는 일을 멈추지 않으며, 제자들과의 소통도 이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던 중 아끼는 제자 파비앵이 산골에서 친구들과 함께 농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탈리는 그의 공동체를 방문한다.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글과 삶을 통해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는 파비앵에게 나탈리는 보수적인 중산층 엘리트로 비친다. 그녀에게도 공산주의자로 살며 당시 소련까지 다녀왔던 뜨거운 시절이 있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세월이다. 나탈리는 급진성을 논하기에 자신은 너무 늙었다며 변화를 인정한다.
삶의 근간을 흔들지 않을 만큼만 세상에 개입하게 된 노년기의 나탈리. 그녀는 더 이상 혁명을 바라지 않으며 그보다 훨씬 수수한 목표를 가지고 일상을 꾸려간다고 말한다. 뜨거웠던 이상은 생활 속에서 정련되며 차가워진다. 나탈리는 다시 한 번 지나가버린 것을 마주하지만 그 시절의 자신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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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한 법
나탈리는 20년 동안 변함없이 휴가를 보냈던 브르타뉴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나보내고, 두 사람 몫의 책들로 빼곡했던 책장에서 남편 책이 덜어져 듬성해져버린 책장을 마주한다. 엄마 장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하던 엄마 때문에 철학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아이들은 장성해 품을 떠나고, 평생 사랑해줄 줄 알았던 남편은 다른 사람에게 가고, 엄마의 죽음까지 닥친 상실의 순간을 그녀는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로 해석한다. 하지만 온전한 자유도, 진정한 행복과 진리도 인간의 이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나탈리는 ‘온전한 자유’를 부둥켜안은 채 지나간 것들을 떠나보내며 혼자 눈물 흘린다.
인간이 이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을 실현할 수 있어서라기보다 현실과 이상의 관계를 견주어보는 과정에서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나탈리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알랭의 <행복론>을 인용하며,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이고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한 법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은 그것이 불완전함을 알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다.
인생은 살아온 방향이라고 해서 계속 같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자의와는 상관없이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게도 한다. 이상은커녕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도 않는 인생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떠나보내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맞이하는 나탈리의 모습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사회와 관계하며 살아가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기사입력 : 2016-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