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가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안토니아스 라인

지아(知我) 2017-07-14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중생 두 명을 집단 성폭행했다가 5년 뒤 범행이 드러난 가해자들이 얼마 전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에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는데, 피고인들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본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가해자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피해자인 여학생 두 명은 중학교 1학년에 불과했다. 밤에 산속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저질렀고, 전화로 친구들을 불러내어 성폭행당한 두 여학생을 또 성폭행하게 했다. 그때 현장에 있던 남학생들은 무려 열한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판결에 불만을 품은 남학생의 부모들이 법정에서 소란을 피워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 젊은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참으로 가부장제 사회의 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성폭행이라는 죄를 저지른 가해자 남자에게 늘 도망갈 수 있는 면죄부를 던져주고, 피해자인 여성을 오히려 죄인처럼 만들어버리는 가부장제 사회 말이다. 자신을 성폭행하기 위해 남학생들이 줄 서 있는 것을 보며 일제시대 군 ‘위안부’가 떠올랐다는,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여러 차례 자살 시도까지 한 여학생의 고통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다름을 존중하는 무계급 모계 공동체

 

▶ 마를린 호리스 연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포스터

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 Antonia’s Line 1995)에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2차 세계대전 후 안토니아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열여섯 살 된 딸 다니엘과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인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30년 전 죽은 남편을 끝까지 저주하며 숨을 거둔다. 가부장제 사회에 여전히 잔존해 있는 여성들의 묵은 상처가 압통처럼 느껴지는 장면이다.

 

어머니의 농장을 물려받고 고향에 정착한 안토니아는 홀아비 바스에게 청혼을 받지만 거절하고 평생 서로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연인 관계로 남는다.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딸 다니엘도 결혼하지 않고 원하던 아이만을 낳는다. 네 살 때부터 철학을 논할 만큼 천재인, 다니엘의 딸 테레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도 결혼하지 않고 딸 사라를 낳는다.

 

안토니아가 딸 다니엘과 처음 마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마치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눈에 띄는 ‘다른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아에서 사라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에서 증손녀로 이어지는 4대의 모계 가족을 당당히 이루어낸다. 그뿐인가. 안토니아는 마을 사람들까지 품어 공동체를 만든다.

 

그들은 마을에서 은근 왕따를 당하는 홀아비 바스를 비롯하여, 친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대지주의 딸 디디, 전쟁 후 허무주의 철학자가 된 안토니아의 소꿉친구 굽은 손가락 등 마을에서 소외받고 상처받아온, 모두 기득권 밖의 존재들이다. 이는 안토니아가 농장에서 이룬 작은 모계사회가 소수자들까지 품어낸 세상임을 말해주는 것일 터.

 

벨기에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는 여성이 남성과는 다르게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자신의 몸 안에서 태아라는 ‘타자’에게 생명과 성장을 허용하는 임신의 과정 자체가, 차이를 배제하고 계급 서열상으로 구분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몸속에 ‘타자’를 품을 만큼 여성의 몸이 차이를 존중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오래전 모계사회가 원시 공산주의 사회로 불린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핏줄과 종족이 구분되었던 모계사회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공생하는 무계급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계사회와는 달리 생산물이 풍부해지면서 독점을 지향하게 된 가부장제 사회는 차이 속에서 비교를 낳기 시작했다. 이는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여성혐오를 사회 전반에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그것은 모계사회처럼 차이를 존중하는 공생하는 관계로서 여성을 바라보지 않고, 여성을 남성보다 낮은 서열로 사전에 지정한 채 남성 안의 어둠과 결핍을 투사한 결과다.

 

▶ 마를린 호리스 감독, 빌레케 반 아멜루이, 엘스 도터먼즈 주연 <안토니아스 라인> 1995년

 

며칠 전 밤에 동네 치킨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닭다리, 가슴살, 닭날개 등 부위별로 닭을 나눠 파는 광고판을 보면서,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러하지 않은가 하는 분노 어린 슬픔이 들었다. 닭다리, 가슴살, 닭날개가 조용히 진열된 치킨가게에서 자유로이 뛰노는 닭을 더는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여성의 몸을 남성중심주의 시각으로 그동안 멋대로 해체하고 왜곡시켜온 가부장제 사회의 천박한 이해수준 말이다.

 

‘임신한’의 영어 단어 pregnant와 같은 어원을 지닌 영어 단어 pregnable가 ‘정복할 수 있는’, ‘공략할 수 있는’이라는 뜻을 지닌 것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부르는 이름들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남성 안의 욕망과 결핍이 투사된, 오염된 이름들을 우리는 지금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관습이라는 명목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욕망과 결핍이 투사한 ‘여성혐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서도 굴절된 남성중심적 시각이 어떻게 여성을 교묘히 왜곡시키고 있는지 만날 수 있다. 성추행을 몰래 일삼는 마을의 가톨릭 신부가 다니엘이 결혼하지 않고 임신하려고 하자, 미사 시간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안토니아 모녀를 비난하는 추악하고 비열한 모습이 그러하다.

 

이 장면을 보며, 순간 현실감 넘치는 기시감을 느꼈던 것은 한국의 남자목사가 성직자라는 권위와 신앙심을 이용해 여자신도들을 성폭행하는 소식을 TV 뉴스에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영화 속 신부처럼 유별나게 금욕과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타인을 쉽게 죄인으로 판단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야 한다. 여성 안의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의 여성 존재의 아름다움을 가부장제 사회가 오랜 세월 어떻게 훼손했는지를 말이다. 이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여성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우울과 신경증의 전조일 터이다.

 

▶ 마를린 호리스 감독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 Antonia's Line)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1995년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들었던 자각 중의 하나는, 유교 문화에서 성장한 한국여성들 대부분이 이중의 억압을 받고 있으며, 그 억압을 넘어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기존에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에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여성의 몸에 관하여 가부장 문화가 이름을 붙이고 평가하는 것에 여성들 스스로 길들여진 경우가 많다. 몇 해 전 어느 모임에서 청소년기를 훌쩍 넘어선 성인여성들이 남자들에게 보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생리대를 마치 밀거래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그래서 많이 안타까웠다. 별거 아닌 작은 일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 상황이 내 머릿속에 남았던 것은, 월경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월경은 불결하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예부터 여성들이 월경을 하기 때문에 부정을 탄다고 믿었고,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피를 흘린다고 생각했다. 중세 시대에 월경은 ‘타자’를 규정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 했다. 서로 배척하던 유대교인과 가톨릭 신자가 서로 자신들이 더 정결하고 바른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미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던 월경을 서로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서로를 ‘타자’로서 비난하기 위하여 상대가 월경을 한다고 주장하며 급기야 월경하는 남자를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일까지 벌였던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존재 자체로 차별받고 비하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일 터. 또 그 잘못된 믿음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여성혐오 현상의 썩은 뿌리로서 작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 모계사회에서 월경은 생명을 퍼뜨리는 가능성으로 존중받았다. 남성과 달리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졌으며, 월경 중인 여성 혹은 출산하게 되는 여성들을 공동체에서 보호해주는 것도 공생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열네 살 무렵, 난생처음 마주한 팬티에 묻은 혈흔이 당황스러웠던 초경의 기억이 내게는 있다. 월경은 왠지 부끄러운 것, 여성이 되어가는 두렵고 불안한 과정으로만 다가왔었다. 하지만 그날 밤 가족들의 기대하지 못했던 축하를 받게 되자, 월경이 여성의 권리이자 축복이라는 사실을 희미하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자각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단단해져 갔는데, 몸속에 달이 차고 기우는 자연의 순리를 지닌 여성 존재를 알아갈수록(월경의 어원이 달이 뜨고 지는 현상에서 연유된 것으로 여성의 월경 주기가 달의 변화 주기와 같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온 사실이 아닌가), 여성만이 지닌 여성 존재의 아름다움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내내 묵직했던 것은 여성들에게 ‘내 안의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라’고 안토니아가 시종일관 도발적으로 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과정이 때론 고통스러워도, 때론 절망스러워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그 모험의 과정을 거쳤을 때 더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이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영화가 내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마를린 호리스 감독, 빌레케 반 아멜루이 주연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중에서

 

가부장제를 벗어나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이십 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급진적이고 이상적으로만 보였던 이야기가 또 이제 현실로 세상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안토니아의 딸 다니엘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갖겠다고 하자 안토니아가 딸과 함께 도시로 나가 멋진 남자를 찾아 주고, 다니엘이 임신 계획을 숨긴 채 하룻밤 잠자리에 성공하여 딸 테레사를 낳는 것을 보며 이미 유럽에서는 일반화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만 낳아 가정을 이루는 세태가 떠올랐다.

 

영화는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를 벗어난 여성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창조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현실 가능하다는 것을 오랜 시차를 넘어서 지금, 우리들에게 선물해주고 있다.

 

그것은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귀향하듯, 아주 오래전 모계사회로의 회귀를 반짝이며 말해주는 듯하다. 모든 혐오와 차별의 끝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이 역설적으로 강하게 설파되고 있는 요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동일성을 요구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지정한 ‘정상 가족’의 범주를 벗어난 다양한 공동체들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공동체들의 정신적인 뿌리가 되어주는 것은, 바로 약하고 소외받는 타자들까지 모두 껴안아 더 큰 공동체를 이뤄나갔던 모계사회가 아닐까. 그래서 페미니즘은 엄밀히 말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지평을 넓혀주는 휴머니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영화의 처음과 끝이 안토니아가 죽음을 맞는 장면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서 달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고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벅찬 눈물이 차오르면서 안토니아의 죽음이 오래전 죽은 모계사회의 부활을 약속하는 상징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느 날 갑자기 염세주의 철학자 굽은 손가락이 죽자 슬픔에 잠긴 손녀 사라에게 전하는 안토니아의 말은, 그 약속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완전히 죽는 것은 없단다. 항상 무언가는 남기게 되어 있지.
또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도 하고.”

 

그렇다. 죽음은 끝이 아니요,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상태. 막다른 끝에 도달한 가부장제 사회의 대안으로, 타자와 공생하는 모계사회를 꿈꾸며 혁명해야 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한 자막은 희망의 전조등이 되어 그 길을 밝혀줄 것이다.

 

“이 긴 세월 동안의 경험으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반복해서 보이는 안토니아가 농장의 밭에 씨를 뿌리는 장면.

 

[안토니아스 라인을 더 잘 읽기 위한 영화 미학]

 

1996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마를린 호리스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페미니즘 영화의 고전이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고 있다. 그런데 20세기 중남미 문학을 통해 등장한 이 마술적 리얼리즘이 독재 사회에서 현실을 고정되게 바라보지 않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전복시키는 표현으로 등장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서도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는 갈망 속에서 이 기법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례식 중에 죽은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 노래를 부른다든지, 천사 동상의 날개가 파렴치한 신부를 밀어서 넘어뜨리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 다니엘의 시선으로 포착이 되고, 다니엘을 통해 여성들의 욕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동시에 감독의 이상을 보여준다.

 

한편, 아이들의 기쁜 탄생으로 이어지던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수많은 죽음을 보여주며 인생의 슬픔과 허무함을 드러낸다. 이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안토니아의 죽음으로 채운 의도와도 맥을 함께하는데, 삶과 죽음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놓여 순환하다는 진실을 전해주며, 모계사회의 부활 또한 역설적인 징조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보이는 안토니아가 농장의 밭에 씨를 뿌리는 장면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모계사회를 향한 작지만 단단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안토니아에서 사라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지난하게 이어진 생명력을 말해준다. 모계사회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듯 끊임없이 타자와 나누는 삶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기사입력 : 2017-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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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ther 17/08/22 [15:03]
대학교때 봤던 영화를 십년이 지나 다시 찾아보다가 우연히 칼럼을 읽었어요. 너무너무 좋은 글이라 감명받고 갑니다. 저 영화를 또 찾아볼 수 있을지 뒤져봐야겠네요...
SALM 17/08/17 [10:28]
전체적으로 잘 짜인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오류 하나 지적하자면,pregnable 어원은 prehend 입니다.pregnant 어원은 pre gn ant (태어나기 전 상태인) 또는 frig nant (프리그 여신의 상태인)입니다. 첫번째가 공식적인 것이고,두번째가 민간어원설이죠. 프리그 여신이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거든요.따라서 pregnable과 pregnant는 전혀 다른 말이죠.
난나민나 17/07/19 [16:12]
안토니아스라인 꼭 봐야겠네요! 이런 영화가 있는줄 몰랐어요! 좋은글 감사! 칼럼이 연재같은데 나중에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토마토 17/07/14 [23:05]
글읽자마자 영화찾아서 봤어요 20년전에 이런영화가 있었다니... 여전히 가두어진 여성상의 현실에서 많이 벗어나진 못했지만 어떻게 나로 돌아올수 있을지 생각하게 합니다
모라인 17/07/14 [17:42]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글을 참 잘쓰세요! 영화를 궁금하게해주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걸 알게해줘서 감사합니다~
씨앗 17/07/14 [12:50]
벌써 이십년이 지났나요? 이 영화가 의미하는 바를 이제야 깨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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