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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외주화…‘고문실’이 되고 있는 일터
일레인 스캐리 作 <고통받는 몸>의 사유를 확장하기(2)
김영옥   |   2019-01-27

고통, 고문, 전쟁, 언어, 창조성에 관한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인간의 문명을 고찰한 일레인 스캐리(하버드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고통받는 몸>(1985) 한국어판이 나왔습니다. <이미지 페미니즘>의 저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김영옥 님이 스캐리의 사유를 안내하고, 더 깊이 확장하는 글을 4편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고문과 자백

 

인류의 ‘창조하기’와 그것을 역행시키는 ‘파괴하기’에 관한 스캐리의 역사적 검증은 고문에서 가장 격하고 역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몸에 가해지는 의도되고 계획된 고통으로서의 고문. 고문은 한 사람의 자아와 언어, 세계를 철저하게 부숴버리겠다고, 차갑고 냉정하게, ‘휘파람을 불면서’ 장담하고 또 실천한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문 전문기술자의 탈인격화된 ‘전문성’은 이 휘파람 불기에서 역겨움의 정점을 찍는다.)

 

▶ 독재정권 시절 자행되었던 고문이라는 국가폭력을 다룬 <남영동 1985>(정지영 감독, 2012) 포스터. 故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민주화운동 청년연합 의장이었던 故 김근태의 실제 ‘남영동’ 고문 사건을 영화로 옮긴 <남영동 1985>에서 대한민국 ‘보통’ 국민들이 직면하게 되는 것은 고문 전문기술자가 으스대며 과시하는 ‘전문기술’의 악마적 얼굴이다.

 

한때 전문기술자로서 대한민국 특정 시기 고문정치의 ‘탁월성’을 증명했던 이근안은 목사가 되어 자신의 능력이 사람들의 영혼을 유혹하는 일에도 탁월하게 기능함을 보여주었다. ‘고문(그에 따르면 심문)도 예술이다. 상대방을 감동시켜야 자백을 받아낼 수 있다’고, 시사주간지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증언한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건 일종의 예술이었다”, 한겨레, 2011년 12월 12일자 참조)

 

이근안 같은 사람들의 이해에 따르면 고문기술자와 목사, 둘 다 상대방을 감동시켜 ‘죄의 자백’을 받아내는 예술/기술(techne)에 능하다. ‘만들기’의 인류사적 대 성과로 스캐리가 상세히 논의하고 있는 성서, 즉 만들어진 신과 그 신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는 인간 사이의 대서사시가 이근안이라는 한 인간에게서 쪼그라든 상태로 비열하고 파렴치하게 재연된다고나 할까. (김근태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겪은 고문을 기록한 수기 <남영동>(중원문화, 2012)에서 고문기술자들이 “절대전능한 신”으로 군림했다고 기억한다. “고문대 위에 묶여 있을 때 들려왔던 고문자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그에 회답하는 나의 떨리는 음성과 순명하는 마음가짐은 저 하나님 명령을 귀 기울여 듣는 아브라함 같은 것이었다.”)

 

스캐리가 거듭 강조하듯, 상대방을 ‘감동시켜’ 받아낸다고 전제되는 ‘죄의 자백’이란 없다. 만약 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 ‘자백’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는 내가 아니다’, 또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무효 선언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고문전문가들이 노리는 궁극의 목표다.

 

이 무효 선언은 영성수련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자발적 고백도 아니고, 자기 안과 밖의 타자/성들을 향한 열림으로써만 허위의식의 폐쇄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탈근대적 깨달음도 아니다. 몸에 가해지는 고통으로 자아와 언어, 세계를 완전히 파괴당한 존재의 비존재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근안 유의 목사가 ‘탁월한 감동의 예술’로 낚고자 하는 신도들의 자백/고백은 어떤 것인가, 어떤 것일 수 있나. 현실 속에서 드물지 않게 확인할 수 있듯이 ‘주여, 저는 죽었습니다. 당신 앞에서 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는 자백/고백은 오인된 자기 부정일 확률이 높다. 이것은 자신을 타자로 재/발견함으로써만 가까스로 자아의 동일자적/동어반복적 블랙홀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랭보의 ‘나는 타자다’라는 고백과는 다른 길을 간다.

 

그 이면에는 오히려 끝까지 동일자로 존재하려는 (때론 오만한, 때론 게으른) 욕망이 숨어 있기 십상이다. 이들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화폐거나 또는 홑겹 자아의 권력의지라면, 이들은 동일자로 가능한 오래 살기위해 흡혈귀처럼 타자들의 피를 빨거나, 아예 타자들의 존재 자체를 무효 선언해버릴 수 있다.

 

이근안 유의 목사가 예술적 기예를 총동원해 어쩌면 매주 받아내고 있을 저 ‘죄의 자백’, 즉 자기 무효 선언은 결국 타자들의 존재를 무효 선언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사회에서 점점 더 노골적으로 번지고 있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성소수자 혐오 앞뒤좌우에서 소란스럽게 펄럭이는 게 바로 이런 알리바이들 아닌가.

 

‘나는 내가 아니다’의 전혀 다른 의미 

 

 ▶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

그러나 스캐리를 변호하기 위해, 스캐리와 함께 말하자면, 이런 욕망과 술수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기념비적인 양대 창조물로 그녀가 분석하고 있는 신과 화폐의 ‘본래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다.

 

구약성서의 유대교 신에서 신약성서의 기독교 신에 이르는 ‘창조물’ 신의 이야기는 육체와 탈육체화의 변증법적 과정을 다양한 이미지와 이야기로 직조해낸다. 그 핵심에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남으로써 보다 넓고 깊숙하게 세계 안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과, 육체이기에 육체로서 육체인 타자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고 연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응하며 서로를 견인하고 있다.

 

인간의 몸으로 인간에게 온 신 예수가 갈파하듯이, 여기서 ‘나는 내가 아니다’는 ‘나를 벗어나 너를 건너서만 나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파괴하기’의 대표적인 사례인 고문에서,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허구처럼 들릴 수 있는지 다시 남영동 고문실을 경유해 느껴보자.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한 고 김근태는 그곳을 ‘인간 도살장’으로 불렀다. 그곳은 ‘그야말로 가슴으로, 아니 온몸으로 그 고통과 공포에 발가벗긴 채 내던져진 사람’만이 뼈저리게 알 수 있는 ‘그런 곳’이다.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삶으로 내동댕이쳐져 경험하게 되는 ‘그런’이 가리키는 건 무엇인가. 그곳에서 들은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단말마 비명을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 비명들은 (…) 송곳같이, 혹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번쩍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돼지기름처럼 끈적끈적하고 비계처럼 미끄덩미끄덩한 것이었습니다. 살가죽에 달라붙은 그 비명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멱이 따진, 흐느껴 대는, 낮고 음산한 울려 퍼짐이었습니다. 무슨 슬픔이나 비장한 느낌이 들기는커녕 속이 완전히 뒤집히고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파고들어 왔기에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근태, <남영동>, 중원문화, 2012)

 

고문기계 앞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무엇’은 더 이상 목소리가 아니다. 목소리로 나름의 의미를 발화하는 자아가 아니다. 그 ‘무엇’은 살가죽에 달라붙어 끈적거리고 미끄덩거리는 점액질의 어떤 흔적일 뿐이다. 흔적이라 해도 환기보다는 망각과 사라짐에 더 근접해 있는 흔적이다. 여기에는 비체(abject)라고 일컬을 수 있는 그런 정체성조차 남아있지 않다.

 

끈적거리고 미끄덩거리는 점액질로 낮게 깔리는 저 비존재의 비명은 “고문당하는 비명 소리를 덮어씌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크게 틀어 놓은 그 라디오 소리, 그 라디오 속에서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남자·여자 아나운서들의 그 수다”와 한편이 되어 매우 특이한 비현실의 세계를 구성한다.

 

자본주의 삶 도처에서 발견되는 고문의 기술

 

고도의 전문 기술이 한 사람의 (그로써 시람 일반의) 사람됨을 철저히 부숴버리는 바로 그 시간, 아마도 거실에서 거리에서 버스 안에서 술집에서 쇼핑몰에서 누구나의 귓속으로건 스며들 ‘저 시적이고자 하는’ 분장한 목소리들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의 세계는 그러나 단지 고문실에서만 맞닥뜨리게 되는 건 아니다. 자아와 언어, 세계가 파괴되는 (고문의) 비장소와 ‘시적이고자 하는’ 허위의식의 (자본주의적 세속) 경연장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삶 도처에서 발견된다.

 

각자도생, ‘죽음의 외주화’가 큰 틀에서 삶의 원리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가성비’라는 정의 아닌 정의를 붙잡고 일상을 버텨내려 한다. 죽음을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몫으로 떼어놓음으로써 무재해 사업장 인증을 받고 산재보험료를 감면받는 식의 ‘고도의 전문기술’은 계속해서 더 많은 일터를 고문실이나 수용소로 만든다.

 

자아와 언어, 세계가 도처에서 부서지는데 스캐리가 꿈꾸고, 같이 구현해보자고 우리에게 진지하게 손 내미는 ‘창조하는 노동’의 세계는 어디쯤에서 찾을 수 있을까.

 

▶ 국제노동기구의 청소년/청년 노동자들의 안전한 노동 환경과 건강 증진을 위한 캠페인 자료집 표지 ⓒILO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문명의 징검다리인 ‘인공물들’은 현재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문제는 화폐라는 인공물이 그러했듯, 인공물에 투사된 창조의 에너지가 모든 인간들에게 평등하게 고통 없는 안녕한 삶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분석했고, 스캐리가 재구성한 사실, 즉 투사에 전념하는 사람들과 보상을 넘치도록 선사받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은 더욱 더 확대되고 ‘자연스럽게’ 되어 이제는 거의 대다수 사람들이 이 모순을 역사와 구조가 아닌 사적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만큼 더 우리는 인공물의 진화가 현재 어느 정도에 이르고 있는지, 투사와 보상의 불일치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스캐리의 제안을, 그 제안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의미 있게 현실화시키고 싶다면 피해갈 수 없는 검토일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잉여, ‘사라지는 몸’

 

몇 년 전부터 인공지능, 인공로봇, 포스트휴먼 이야기가 날마다의 공통상식이 되고 있다. 누가 휴먼인가, 가 아니라, 휴먼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로 질문을 바꿀 때 휴먼에서 포스트휴먼으로의 이동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상상적 인식논리 차원에서 ‘인공’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신개발은, 간혹 디스토피아적 염려로 드문드문 얼룩지긴 해도, 유토피아적 기대의 지평을 성큼성큼 확장시키곤 했다. 디스토피아적 염려는 건강염려증처럼 비웃음의 대상이거나, 위장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감정)처럼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처해야 할 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잊지 말아야 할 핵심 질문은 기능성으로 완전히 수렴되지 않는 잉여의 부분들과 상관된다. 조금씩 영혼과 몸을 잠식하다 끝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는 부스러기들이 문제인 것이다.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발화하는 몸은 이 잉여에 해당한다. 잉여로서의 몸은 종종 무시되지만, 핵심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진계 같은 것이다. 신체와 정보를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는가. 또는 자기생성 통일체로서의 인간을 패턴으로 완전히 환원시킬 수 있는가.

 

인공지능에 관해 ‘조직적 상식’을 지니지 못한 비전문가의 언어를 사용해 질문한다면 이런 것 아닐까. ‘인공지능과 통증의 관계를 말할 수 있는가’, ‘포스트휴먼의 이웃이고 친구며 연인인 로봇에게도 고문이라는 저 탁월한 예술/기술이 적용되는가’. 인공지능에게서 궁극적으로 받아내고자 하는 ‘자백’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스캐리는 문명과 문화를 구별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도구 사용하기라는 간단한 자기 확장/투사에서 시작해 화폐, 문화예술 창조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고 펼쳐진 창조하기의 잠재적 능력과 그 능력의 토대가 되(어야만 하)는 선한 의지다.

 

그녀가 1985년 출간한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를 쓸 때의 금융자본주의나 금융화된 일상의 모습은 지금처럼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하고 있는 밀레의 그림을 예로 들어보자. 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신체와 주변 환경의 서로 스밈은 당대 인공지능 시대에 전자신경계적 기술지식이 몸과 감각세계에 가하는 폭력적 강타나 침범과 비교해 볼 때 거의 몽환에 가깝다.

 

폴 비릴리오가 말했듯이, 속도는 전쟁과 필연적인 상관관계에 있다. 전자기술이 가져온 속도는 생산과 소비의 전쟁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결과로 낳으며, 이 전쟁에서도 몸은 의도적인 상해 입히기의 대상이다. 아니, 이 전쟁에서는 아예 몸 자체가 사라지는 운명에 처한다. 무한대로 확장되는 공간에 반비례해 가차 없이 사라지는 시간/성 속에서 육체는 노쇠와 소멸(죽음)의 운명조차 박탈당한 무기력한 잉여들로 수치심을 견뎌야 한다. 시간은 삶과 삶의 죽음-되기, 즉 삶이 이어지는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부패와 변형, 그리고 그 과정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몸 자아는 잉여로 전락한 위상이 가져온 이 수치심, 이 자기부정 속에서 고문 없이도 언어를 잃고 세계를 잃어간다. 기호들의 끊임없는 이어짐과 교환들, 접속들이 (타자-되기로 이끄는) 관계와 결속을 대신하는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로 대상화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과 통증이 아니라, 고통과 통증이 새겨지는 몸의 사라짐이다.

 

윤리의 마비…공감의 기억을 조직하라

 

스캐리와 달리,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미래 이후>(강서진 옮김, 난장, 2013)에서 신체 외부의 도구들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중독’으로 읽는다. 이 중독이 가져온 당대의 테크노소통 환경은 인지체계의 재조정을 초래하고, 이 재조정은 인간의 정신적 자원을 소진시키고 지구의 물질적 자원을 고갈시킨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윤리의 마비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증상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다만 꼭 필요한 어떤 각성을 미루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미래 이후>(강서진 역, 난장, 2013) 앞뒤 표지. 비포는 20세기를 ‘미래를 신봉한 세기’라고 칭하고, 정보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인간의 영혼마저 노동하게 만들었으며 파국에 이르렀다고 분석한다.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에서 우리는 이 각성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샘, 즉 원천을 만날 수 있다. 간단한 농기구에서부터 복잡한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신체 외부의 도구들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몸 정체성의 한계에서 출발해 타자들과 더불어 확장된, 지복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리킨다는 사실 말이다. 이 삶에서 개개인은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세계와도 교감하며,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으로 다가간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열망과 선택으로서, 중독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 다른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의 중독 ‘증상’을 자각하고 다시 저 본래의 열망을, 그 ‘건강한’ 지향성의 상태를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이 기억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몸이 사라지는 현상 자체는 또 얼마나 계급적인가. 몸이 사라짐을 즐기는 계급 옆에서, 몸이 사라지기는커녕 삶의 실존이 오로지 몸의 물리적 사용으로 제한된 사람들의 고통이 있지 않은가. 평등하지 않음에 대한 자각은 새로운 기억 조직을 위한 준비운동이다.

 

신체 외부의 도구들을 향한 중독증이 ‘우리’를 데려간 ‘윤리의 마비’를 좀 더 자세히 느껴보자. 이 ‘우리’ 중 어떤 이들은 타자를 모욕하고 짓밟으며 치명적인 고통을 안기는데서 일상의 권태를 해소할 ‘재미’를 느끼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본인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바로 그 우연한 폭력적 상해 입히기의 목표물이 되어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의 몸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성폭력은 사라지는 몸을 이야기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엄연한 현실이다. 또한 오늘 하루의 생존을 위해 극도의 육체적 곤경을 견디며 자신의 몸만큼으로 졸아든 세상을 사는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들은 고문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몸만으로 존재하다가 그 고립 속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를 젠더, 인종, 계급, 지역 등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 교차적 맥락 속에서 살피지 않는다면 전자신경계적 기술 지식이 몸과 감각세계에 가하는 폭력적 강타나 침범을 논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상적’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나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사이버 폭력을 생각해보라.) 몸을 두고 갈라지는 이 과도한 있음과 저 과도한 증발 ‘사이’를 사유하고 느끼는 입장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3회에서 계속)

 

※ 이 글은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에 쓴 발문을 조금 수정한 내용입니다.

기사입력 :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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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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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정 및 삭제는 PC버전에서만 가능합니다.
ㅅㅅㅎ 19/01/28 [23:28]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독자 19/02/04 [10:00]
모처럼 시간이 나서 정독했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택선 19/02/21 [11:26]
문장 중 "여기에는 비체(abject)고 일컬을 수 있는 그런 정체성조차 남아있지 않다."이 있는데, 어떤 음절이 바뀌거나 빠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읽히지 않아 여러 차례 읽었는데, 이 문장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ㅇㅇ 19/10/10 [15:51]
흠.. 각자도생이 죽음의 외주화 인가요? 잘 와닿지 않네요. 삶의 외주화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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