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연소’ 총리 탄생…핀란드 여성 정치인의 힘

34살 산나 마린, 레즈비언 커플에게 양육됐다고 밝혀

박강성주 2019-12-12

유럽의 (남성) 지도자들이 모여 있다. 그런데 장소가 평범하지 않다. 바로 사우나 장이다. 거의 벌거벗은 몸의 정치인들이 대화를 나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핀란드 총리다. 역시나 사우나에 알맞게 거의 옷을 차려입지 않은, 30대 중반의 여성. 당황하는 이들에게 이 (여성) 총리가 말한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요?”

 

핀란드 드라마 <대통령>에 나오는 장면이다. 남성 지도자들과 사우나를 같이 하며 정치를 논의하는 여성 총리.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성 정치인들. 누군가는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통쾌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이해하는) 핀란드 맥락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2월 10일, 34살의 여성이 핀란드의 총리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산나 마린(Sanna Marin).

 

▲ 12월 10일 핀란드의 총리로 선출된 산나 마린(Sanna Marin). 핀란드 사회민주당 소속 34살의 정치인이다.  ©출처: 산나 마린 페이스북.

 

핀란드의 세 번째 여성 총리, 산나 마린의 이력

 

마린 총리는 핀란드 역사상 최연소 총리이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젊은 정치 지도자로 알려진다. 여성 총리로서는 핀란드에서 세 번째다.(첫 여성 총리는 2003년에 나왔는데, 안넬리 야뗀마끼 당시 중앙당 대표였다.)

 

한국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놀랄 만한 소식이겠지만, 몇 년 정도 핀란드에서 지내며 정치 관련 소식들을 확인해온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산나 마린이 실력 있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린 총리는 스무 살 무렵부터 사회민주당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 왔는데, 2015년 땀뻬레 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처음 당선된 뒤 올해 4월 총선에서 또 당선됐다.

 

그녀의 정치력은 특히 총선을 앞두고 빛을 냈다. 안띠 린네 사회민주당 대표가 건강 문제로 선거를 이끌지 못하게 되었는데, 부대표를 맡고 있던 마린 의원이 선거 운동 전면에 나선 것이다. 사회민주당을 상징하는 붉은 색 옷을 입고 두 손을 번쩍 들며 승리를 다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내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린네 대표가 돌아오기 전까지 선거를 무난히 이끌었고, 결국 사회민주당이 1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뒤 산나 마린은 교통·통신부 장관이 되어 린네 총리의 내각에서 활약해왔다. 그런데 린네 총리가 우체국 파업과 관련된 논란 속에서 12월 3일 갑자기 사퇴했다. 이에 당 자체 경선을 거쳐 마린 장관이 새로운 총리로 뽑힌 것이다.(상대 후보로 나왔던 이는 안띠 린뜨만 사회민주당 원내대표로, 37살 남성이다.)

 

어머니와 동성 반려자 커플의 돌봄을 받고 성장했다

 

한국 언론을 통해서는 얼마나 알려졌는지 모르겠지만, 마린 총리는 무지개 부모(Sateenkaariperhe) 밑에서 자랐다. 친부모는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이혼했다. 그 뒤 어머니가 여성 동성애자로서 새로운 반려자를 만났고, 마린 총리는 이 레즈비언 커플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한다.(어머니는 경선 결과가 확정되었을 때,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로 진행한 핀란드 신문 <아무레흐띠>와의 인터뷰에서, 딸에 대해 “엄마로서 가슴 속 깊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몇 년 전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어떻게 정치인이 되었나를 이야기하며 언론과 자신의 누리집(sannamarin.net)을 통해 밝힌 바 있다.(또한 그녀의 집안은 가난했는데, 대학 때는 앞으로 갚을 수 없을 것 같아 ‘학생대출’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판매원으로 일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동성애자 커플에게서 양육된 여성이 이를 밝히고 국가의 정치 지도자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과연 여론이 어땠을까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 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와 정부의 주요 장관들.     ©출처: 핀란드 정부 누리집

 

마린 내각 19명의 장관 중 12명이 ‘여성’

 

한편, 산나 마린이 핀란드의 새로운 총리가 되면서 또 다른 기록들이 생겨났다. 현재 핀란드는 사회민주당 외에도 네 개의 당이 연립정부를 이루고 있는데, 이 당들의 대표가 모두 (그리고 대부분 젊은) 여성이다.

 

부총리라고 할 수 있는 재무부 장관은 까뜨리 꿀무니 중앙당 대표로 32살이다. 교육부 장관은 리 안데르손 좌파당 대표로 역시 32살이며, 내무부 장관은 마리아 오히살로 녹색당 대표로 34살이다. 법무부 장관은 안나-마야 헨릭쏜 스웨덴인민당 대표로 55살이다. (사회민주당의 경우, 안띠 린네 전 총리가 대표를 당분간 계속 맡기로 했다.)

 

덧붙이자면, 마린 총리의 내각에는 모두 19명의 장관이 있고 이 가운데 12명이 여성이다.(핀란드에는 대통령이 있지만 실제로 국정을 운영하는 이는 총리다. 참고로 핀란드의 첫 여성 대통령은 2000년 따르야 할로넨 사회민주당 대표가 당선되면서 나왔다.) 

 

이른바 정치‧사회적 ‘소수자’가 꿈을 펼칠 수 있는 나라. 32살 여성이 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 레즈비언 부부 밑에서 자란 이가 총리가 될 수 있는 나라. 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핀란드가 많이 부럽다. 

 

2012년과 2018년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2위를 차지했던 녹색당의 뻬까 하비스또 역시 정치‧사회적 소수자다. 남성 동성애자로서, 현재 외교부 장관이며 2024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크게 점쳐진다. 

 

낙관은 금물, 극우 성향 핀란드인당이 지지율 1위

 

물론 마린 총리와 꿀무니 부총리, 그리고 하비스또 장관이 핀란드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지금 핀란드 사회를 보면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이민자와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 적대적인 핀란드인당이 지지율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올해 4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핀란드인당은 0.2% 차이로 2위를 했다.(사회민주당 17.7%, 핀란드인당 17.5%) 다시 말해, 이 극우 성향의 유시 할라-아호 대표가 (강력한 반발이 있었겠지만) 총리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핀란드인당은 총선 직후 첫 번째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 1위로 올라섰고, 그 뒤 계속해서 상승세를 이어오고 있다. 며칠 전 발표된 조사에서는 24.3%를 기록했는데, 총리가 소속된 사회민주당은 13.2%로 4위를 차지했다.(연립정부를 이루고 있는 당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곳은 녹색당으로 13.9%이며 전체적으로는 3위다.) 

 

정치사회적 소수자가 꿈을 펼치려면 선거제도 개혁 필요해 

 

이렇듯 핀란드는 현재 아슬아슬한 정치 상황에 놓여 있다. 그렇더라도 소수자의 배경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라는 것에 부러움을 감출 수 없다. 2020년 4월, 한국에서 총선이 치러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계속 제기되는 이야기지만, 한국은 먼저 거대정당에 유리하게 되어 있는 선거 제도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을 통해 좀 더 공정한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아울러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 같은 법률이 마련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않을까. 제도 자체가 꼭 긍정적인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이러한 노력과 정치개혁이 있을 때 한국에서도 정치인 산나 마린이 나올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사입력 : 201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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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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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2 [23:00]
꿈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가 있구나! 넘 멋지다
비디 19/12/16 [17:00]
부럽
사다 19/12/18 [15:57]
핀란드 걱정스럽다.
어처 19/12/29 [16:19]
유럽에 남녀 공용 대중사우나 많아요. 물론 아무것도 입지 않고요. 할아버지들이 당황했다는 것은 드라마에서
과장 같네요
donkey 20/01/09 [19:43]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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