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과 다시 만난 세계

드라마 시리즈 <겟 이븐>과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박주연 2020-08-27

요즘 ‘레트로’(retro, 복고풍)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1990년대 레트로 감성이 유행이라며 레트로 음악이니 패션이니, 너도나도 레트로 재현에 나서는 모양새다. ‘나의 90년대는 어땠더라?’ 싶은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소녀’들이 떠올랐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치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달라”고 말했던 <천사소녀 네티>나 <꼬마마법사 레미> 등 마법을 부리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소녀들. 케이팝 아이돌 1세대라 불리는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 처럼 무대 위를 장악한 걸그룹. 그리고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여러 감정을 공유했던 소녀들.

 

나는 그 소녀들을 동경했고 또 사랑했다. 그들은 날 들뜨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지금도 ‘소녀’라는 말을 들으면 애틋해진다. 떠오르는 감정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때 그 소녀들이 보여 준 강인한 모습, 뜨거운 열정도 함께 소환된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겟 이븐>(Get Even, 2020년)과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한정현 지음, 민음사)를 접하게 되었다. 두 작품은 TV 드라마와 소설이라는 다른 장르이며 이야기의 배경과 전반적인 분위기도 다르다. 그럼에도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사랑한 소녀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고, 그들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거다.

 

“우린 화내지 않아, 되갚아 줄뿐”

 

영국의 엘리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겟 이븐>은 청소년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YA(Young Adult)소설 「Don’t Get Mad」 시리즈를 원작으로 두고 있다. 그레첸 맥닐 작가의 원작 시리즈는 <Get Even>과 <Get Dirty> 두 편까지 나와있는 상황이다. 1편에 해당하는 <Get Even>은 2014년에 출판되었다.

 

올해 공개된 TV 시리즈 <겟 이븐>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서로 인종도 배경도 성격도 다른,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여학생 4명의 비밀 클럽 DGM(Don’t Get Mad, 화내지 않아)의 이야기를 다룬다. 

 

▲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겟 이븐' 중   ©Netflix


단지 우연한 기회에 한 자리에 있었던 4명의 소녀가 모여 만든 DGM은 사교 모임을 하는 클럽이라기보다 임무를 수행하는 비밀 결사대에 가깝다. 그 임무라는 것도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거다.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엘리트 고등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괴롭힘과 따돌림, 선생님의 위계폭력 등의 부정의를 고발하고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행동하는 것.

 

이런 설정 만으로도 관심을 가지기 충분했지만, 고백하건대 이 작품에 빠져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키티, 브리, 마고, 올리비아가 서로를 마주 보고 DGM의 구호이기도 한 “우린 화내지 않아, 되갚아 줄 뿐!”(We don’t get mad, get even)이라고 외치는 장면 때문이었다.

 

어린 소녀였던 내가 만화 속 소녀들이 멋있는 구호를 외치며 ‘평범한’ 소녀에서 전사로, 영웅으로 변신하던 모습에 마음을 뺏겼던 것처럼, DGM이 손을 뻗고 소리를 지를 때 이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소녀들은 어김없이 날 들뜨게 했다.

 

‘소녀답게’ 문제에 맞선다

 

DGM 멤버들은 초능력을 가졌거나 특출난 존재들이 아니다. 키티는 부자들로 가득한 학교에서 장학금을 타야만 하는 아시안 이민자 가족의 첫째 딸로, 뭐든지 잘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브리는 권력을 가진 부자 아빠를 뒀지만, 바쁘기만 한 아빠의 눈에 띄기 위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반항하고 있다. 올리비아는 학교에서 가장 잘 나가는 그룹에 속해있지만 진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고, 마고는 전학 온 직후 괴롭힘을 당한 뒤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시간을 버티고 있다.

 

이렇듯 네 소녀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마주하며 흔들리고 실수하고, 사랑에 빠졌다가 실패한다. 사랑과 우정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친구에게 상처 주고 자신도 상처 입는 일을 빈번하게 겪는다.

 

▲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겟 이븐> 중   ©Netflix


하지만 그럼에도, 잘못된 일을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 누구도 손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움직인다. ‘이렇게 대담한 일을 하는 DGM은 분명 남자일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이용해, 의심 받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약점을 유리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은 유약한 소녀도, 발랄하기만 한 소녀도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거나 희생양이 되지도 않으며, 과장된 모습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낼 뿐이다. 그건 실제 내가 봐왔던 무수한 소녀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소녀의 의미를 확장하는 ‘소녀 서사’

 

<겟 이븐>이 마법소녀물 애니메이션 실사판을 보는 것처럼 소녀들의 활약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면,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소녀’의 의미를 되묻게 하고 역사 속에서 존재해 온 ‘소녀’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 한정현 작가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와 전작인 <줄리아나 도쿄>   ©일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비롯한 소설 8편이 수록된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호명되지 않았거나 입체적으로 조명되지 못했던 인물들을 다룬다. 국극단에 들어가 소녀 연예인으로 활약했던 이들,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만신, 나체시위를 했던 여공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여학생들, 기지촌 ‘이모’들, 남자이름을 썼던 로맨스 소설가, 시대에 순응하기도 하고 맞서기도 했던 레즈비언,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죽고 싶어한 트랜스젠더…

 

책 속에서 인물들의 정체성은 하나로 한정할 수 없이 겹치고 맞물린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야기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탓에 무대 위의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해 사랑의 말을 건네던 어둠 속의 소녀들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소녀 연예인 이보나’와, 연작처럼 이어지는 소설이 모두 ‘소녀’라는 단어를 전복적으로 확장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들을 새로운 ‘소녀 서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대와 국경을 횡단하는 ‘소녀’들

 

‘소녀’들은 나의 동경의 대상이자 애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회에서 규정하는 소녀의 이미지는 내가 목격해온 소녀들과는 뭔가 달랐다. 어색했고, 과장되어 있었으며, 단편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으로서 온전한 혹은 정상적인 존재로 취급 받지 못했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들 또한 ‘소녀’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실재와 달리 사회에서 규정한 무언가로 재단되고, 덜 완전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치부되니까.

 

이 책의 정말 흥미로운 지점은 그런 ‘소녀’들에게 진짜 ‘서사’를 붙여주었다는 거다. 연구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도 한 한정현 작가의 글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허투루 만들어지거나 설정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책을 읽는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들이 생생하다. 동시에 소설로서의 특색도 분명히 드러난다. 작가는 인물들의 이름을 중첩되게 사용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이 인물들이 현실에선 불가능한, 시대와 국경을 넘나들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오늘의 일기예보’에서 광화문 퀴어 퍼레이드를 언급하며 “정치에 관심 있는 거요? 그런데 이거 이제 일상 아닐까요”라고 말하는 보나가,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서 제주 4.3사건을 피해 도망친 후 여성국극단에 들어가는 이 씨/이보나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끔 말이다.

 

또한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역사 속 ‘소녀’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소녀’들에게도 역사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신여성’과 ‘S언니’가 논란이 되었으며 “어디 여자가 남자 행세는 하고는”이라는 말을 하던 경성시대부터 “남자 화장실 가면 갑자기 누군가 들어와서 내 어깨를 홱 잡아 돌리고 내 몸을 훑는 상상을 하게 돼서” 성평등 화장실을 바라게 되는 현재까지, 시간 속에서 그 ‘소녀’들이 살아온 환경은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도 짚는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 그리고 <겟 이븐>을 통해 무한한 ‘소녀’들의 세계를 다시 만났다. “어쩌면 국경을 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소녀 연예인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또 다른 소녀들의 숨길 수 없는 사랑일 것”(소녀 연예인 이보나’ 중)이라는 말처럼, 숨길 수 없는 그 사랑이 이 세상의 부정의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도 다시금 깨달았다.

기사입력 : 202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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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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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네 20/08/27 [12:43]
줄리아나 도쿄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작가님 차기작이 나왔군요. 제목도 넘 땡김ㅋㅋ 소녀 연예인 이보나라니!
흐를유씨 20/08/27 [13:19]
와! 너무 재밌어요!
mjkyu 20/08/27 [14:05]
오, 잔잔한 감동인데요? 
선녀 20/10/20 [10:58]
get even과 한정현 소설에 급 관심을 끌게하는 글 너무 감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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