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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운전사, 다른 여성에게도 권하고 싶냐고요?
<기록되어야 할 노동> 택시 기사 신은경
희정   |   2022-11-19

마흔네 살에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시작하셨네요.”

“그때는 젊은 걸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젊었던 것 같아요.”

 

일 구하는 것이 급했다. 딸 아이를 태어난 지 백일 무렵부터 혼자 키웠다. 아이가 갓난쟁이였을 때는 일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부모님 계시는 고향(공주)으로 가진 못하고, 서울과 고향의 중간 지점인 천안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유치원 보육교사부터 시작했다.

 

“유치원은 등하교 지도를 하잖아요. 유치원 차량에 교사가 탑승을 해요. 천안 시내 전역에서 그 유치원으로 아이들이 왔어요. 제가 6년을 근무했거든요. 매일 등하교 지도를 하다 보니까 천안 시내 골목 골목을 잘 알게 된 거예요.”

 

유치원 차량을 운전하는 기사를 보며 생각했다. 길을 저렇게 잘 아는데 왜 택시 운전을 안 할까?

 

마흔이 훌쩍 넘어서자 슬슬 퇴사 압박이 왔다.

“유치원 교사 하면 대부분 젊은 선생님을 생각하잖아요.”

나이에 밀려 이직을 해야 하자, 택시 운전사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때 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데 여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많지 않고. 몸으로 한번 부딪쳐 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말로 열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부닥쳐 보는 게 파악이 더 빠르겠다.”

 

▲ 신은경 씨의 운전면허증.

 

택시 기사가 되다

 

택시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었다. 출근 첫날, 자신을 본 관리자의 인상이 어두웠단다. 그 이유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됐다. 

 

“그분이 보기엔, 내가 진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인 거예요. 여기 험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 나중에 보니까, 이런 말을 돌려 하셨더라고요.”

 

관리자는 체구가 작고 인상도 순한 은경 씨가 ‘험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미덥지 못했던 게다. 택시 운전석에 앉고 보니 별별 일이 다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어느 정도 도덕이나 예의를 지키고 살려는 사람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요.”

 

은경 씨는 점잖게 돌려 말했다. 일 자체도 고됐다. 격일제로 하루 18시간을 근무했다. 아침에 나가서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일도 버거웠는데, 집에는 아직 초등학생인 자녀가 있었다. 밤새 아이를 혼자 두고 택시를 몰아 번 돈은, 한동안 100만원도 되지 않았다. 이 일 적응되면 수입이 나쁘지 않다. 택시 일 오래 한 사람들이 옆에서 해준 이 이야기를 위안 삼아 버텼다.

 

“2년이 지나자, 비로소 택시 기사가 돼가는구나 생각했어요.”

 

수입도 안정권에 올랐다. 안정된 수입은 자부심이 됐다.

 

“내 나이의 여자 월급치고 좋은 편이었어요. 내가 돈 때문에 누구 앞에 가서 비굴해지지 않을 정도가 됐잖아요. 내가 일을 함으로써 나와 내 아이가 원만하게 살아가고, 딸한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데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 즐거움을 위해 포기한 것도 적지 않다. 하루 18시간을 일하기 위해, 집에 오면 먹고 자고 쉬고 집안일하고… 무한반복이었다. 취미나 사람 만나는 약속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택시 기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참 힘든 일이에요.”

 

무섭지 않냐고요?

 

힘든 일이라 했지만, 10년을 일했다. 이 일이 적성에 맞았다. 택시 운전은 혼자 하는 일이라 좋았다고 했다. 회사가 요구하는 금액(사납금)만 채워주면 크게 간섭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택시 안에는 기사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낯선 사람을 늘 뒷좌석에 태워야 한다. 택시 기사를 폭행한 승객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여성 승객이 남성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탔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여성 택시 기사는 역으로 느끼진 않을까.

 

“손님들도 자주 물어보세요. 무섭지 않냐고. 그런데 저는 무섭지 않아요. 술 마시고 화가 많이 난 손님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분들이 나를 해코지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어요. 화난 상태여도 5분, 10분 가는 동안 그분들 입장에서 대화를 하면 마음이 풀어져 있어요.”

 

같이 싸우려 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싸우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맞춰주거나 참는 게 아닐까. 택시 기사가 감정노동까지?

 

“저는 오히려 보육교사로 일할 때가 사람 대하기 더 어려웠어요. 유치원 업무 중 반은 아이들과 보내는 거고, 나머지 반은 학부모를 상대하는 거라 생각하시면 돼요. 학부모분들은 한 번 만나면 최소 일 년을 봐야 하잖아요. 한번 틀어지면 길게 감정이 쌓이게 되고,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 택시는 길어야 10분, 20분이면 보는 일이 끝나는 거잖아요. 그 시간 동안 이 손님이 뭔가 많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구나 해도, 택시에서 승객이 내리면 끝나는 거잖아요. 저 사람이 저럴 수도 있지. 오늘 기분 나빴나 보네. 이러고 그냥 끝.”

 

일회성 만남은 은경 씨에게 타격감이 덜 했다. 내 마음만 다스리면 되는 일이라고 했다. 보육교사 시절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앞으로의 업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상대의 감정을 추스르고 조율하는 일이었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도 이름 없는 승객 흉도 대놓고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대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만큼이나 상대에게 책잡히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사람. 그러니 보육교사에게 일단 책임부터 묻는 돌봄 노동이 버거웠을 테다.

 

승객에 대한 선입견 버리기

 

택시 기사를 하며 승객과 시비가 붙은 적은 단 한 차례뿐이라고 했다. ‘기사가 여자라서 골목길을 못 지나가는 거’라고 수군거리던 승객과의 일이었다. 이것 외에는 없다. 일방적으로 참기만 해서 싸움이 없나 했는데, 들어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승객분들도 보면, 좀 인상이 험해 보인다 싶으면 경계를 하고 말끔하고 사무직처럼 보이면 경계를 내려놓게 되는데. 그거 진짜 선입견이잖아요.”

 

하루에 60명쯤 승객을 태운다고 했다. 1년이면 9천 명의 사람과 만난다. 10년을 했으니, 수만 명을 택시에 태웠다. 손님이 걸어오는 것만 봐도 어디쯤 가겠구나 알아채는 경지에 올랐다고 했다. 그토록 다양한 사람을 매일 만나며 깨달은 것이 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긴 하지만 입성이 초라해가지고 ‘꼬장’을 부릴지도 모르겠구나 했는데, 막상 대화를 해보면 정말 선한 말을 하고 내리고. 어떤 분은 멀끔히 신사 행색으로 타서 말하는 거 보면 전혀 아닌 경우도 많아요.”

 

서비스업 특성상 사람 보는 눈이 넓어졌다고 했는데, 그건 빠른 판단과 분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커졌다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하는 법을 익혔다. 이런 태도가 은경 씨가 큰 시비 없이 일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겠구나 추측한다.

 

‘여자 같은’ 택시 기사

 

“제가 처음 갔을 때, 택시 사람들이 저를 신기하게 봤어요. ‘여자 같은’ 택시 기사가 없는데 ‘여자 같은’ 사람이 왔다고요. 10년 넘게 택시 기사로 살았으니 저도 이제 많이 변했겠죠?”

 

‘걸걸한’ 여자들이 ‘남자들이 하는 일’에 뛰어든다는 인식이 강하다. 은경 씨만 봐도 그 말은 맞지 않다. ‘남자 일’이라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들의 변모가 있을 뿐이다. 기사에서 본 이야기인데, 여성 택시기사가 기자에게 묻는다. 커트 머리가 아닌 여성 기사를 본 적 있냐고.(“여성 택시 운전 100년, 여성 운전사의 이야기”, ytn, 2018년 7월 8일자)

 

장시간 노동에 집안일까지 하느라 늘 시간이 부족한 사람에게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기도 하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얼핏 밖이나 뒤에서 보면 성별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남자 같은 여자’가 되는 것은 여성 택시 기사들에겐 일을 지속하는 노하우였다. 어쩌면 그런 여성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 여성 택시 운전사는 100년 전에도 있었다. 1930년 6월 대중잡지 〈별건곤〉에 국내 최초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 씨의 이야기가 실렸다. “내가 운전대에 앉겠다는 등… 별별 추잡스런 농을 다 걸지요. 처음에는 어찌나 속이 상하든지 당장 뺨이라도 갈기고, 채신없는 자식들이라고 욕이나 실컷 해주고 싶었지만 직업의 성질상 어디 그럴 수가 있나요.”

 

“누구나 택시를 몰 수 있지만, 누구나 택시 기사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누구나 할 순 없는 일을 하는 은경 씨의 장기근속 노하우는 생계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사정이었다. 아이와 함께 세상에 나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동료들이었다. 처음 입사한 택시 회사에는 여성 동료가 대여섯 명 있었다. 다들 활달하고 호탕하게 웃는 사람들이었다. 전국에 400여 명의 여성 택시기사들이 있다고 한다. 전국을 놓고 본다면 몹시 적은 수이다. 그러니 한 회사에서 5명이나 되는 여성 동료들을 만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도움을 주고 받으며 일에 적응했다.

 

여성 동료들만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택시(기사)가 정이 많아요.” 거칠어 보이는 택시 동료들이 은근히 정이 많고, 신사인 척하는 사장님들이 뒤에서는 온갖 편법을 저지르는 걸 은경 씨는 직장생활을 하며 보았다고 했다. 정 많은 택시 기사들이라…. 종종 취재차 택시 노동자들을 만나온 터라, 나는 이들의 거칠고 자유로운 면모를 안다고 생각했다. 말투조차 조심스러운 은경 씨가 동료들과 잘 어울렸을까 궁금했는데, 들어 보니 보통 잘 지내는 정도가 아니었다. 동료들과 노동조합도 만들었다.

 

회사랑 싸우다 보니 강해졌어요

 

택시 운전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나 은경 씨는 회사를 옮겼다. 그의 첫 직장은 ‘초보 기사 교육소’라 불리는 곳이었다. 보수는 적었지만 신입 기사에게 관대해서 일을 배우기는 좋아 그런 별칭이 붙은 것이다.

 

택시기사의 보수 수준을 정하는 것은 대개 사납금이었다. 회사가 가져가는 돈(사납금액)이 커지면 기사의 소득이 줄어든다. 그래봤자 다른 업체들과 월 20만원 차이. 하지만 일하는 사람에게 20만원은 큰 금액이었다. 한 달에 승객 30명은 더 태워야 그 돈이 자신에게 떨어졌다.

 

새로 옮긴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었다. 하지만 회사와 절친한 노조였다. 은경 씨와 친목계를 하던 택시 동료들은 다른 노조를 만들 준비를 한다. 민주노총에 가입한 것이다. 노조를 가입하자, 회사는 연이어 징계를 내렸다. 은경씨에게만.

 

“제가 교통사고 내고 사유서를 쓸 때 그렇게 울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타깃이 됐나 봐요. 여자가 우니까 약해 보여서, 이 사람은 괴롭히면 나가겠다…”

 

이제껏 택시 몰면서 사람들 앞에서 눈물 보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교통사고라는 잘못을 저지른 것도 충격인데 사유서까지 쓰려니 눈물이 나더란다. 한평생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며 모범생처럼 살아온 은경 씨에겐 울만 한 일이었다. 그 눈물을 나약함으로 읽은 회사는 자신을 본보기로 삼은 듯했다. 사고를 사유로 해고를 했다.

 

“택시 업계에선 교통사고가 해고 사유인가요?”

“아니요. 제가 그 회사에서 유일했어요.”

 

한 해 2만여 건의 교통사고가 택시 업계에서 일어난다. 2010년 기준, 법인 택시 하루 평균 운행 시간이 9-11시간이었다. 은경 씨도 격일로 18시간을 몰았다. 장시간 노동은 사고를 만든다. 그럼에도 택시회사가 하는 일은 노동환경을 바꾸는 대신 안전교육을 하고 조회 때 조심하라고 몇 마디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고를 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은경 씨를 해고했다.

 

해고에 이유가 아니라, 목적이 있던 것이다. 이것은 법원도 인정한 일이다. 은경 씨는 소송을 통해 대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 판결을 받는다.

 

“제가 강하다고 생각하진 않고 살았는데, 회사랑 싸우다 보니 강해졌어요.”

 

변론서를 직접 쓰다

 

법원으로 해고 문제를 가져가면서 그는 유시민이 1985년에 쓴 ‘항소 이유서’를 찾아 읽었다.

“읽고 또 읽었어요. 그 글에 내 상황을 대입해서 제가 변론서를 썼어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기 상황이 판사들에게 보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내 문제는 스스로 변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남 3녀였어요. 어렸을 때 정말 시골에서 자라면서, 우리 집이 다른 집에 비해 유독 더 남아 선호가 심했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도 전 불만이 좀 있었어요. 부모님은 왜 아들 먼저 챙기지? 왜 그래야 되지? 나는 당연히 양보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았거든요. 누구도 나를 위해서 나서주지 않는데, 나라도 억울하지 않게,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자란 거 같아요.”

 

스스로 자신을 지켰다.

 

“해고 싸움에서 내가 정말 이기는 건, 회사 사람들 앞에서 내가 초라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비로소 이기는 거라고.”

 

회사는 위로금 얼마를 줄 테니 부당해고 소송을 취하하라고 했다. 법정 소송 4년의 시간을 설비-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안전관리 요원으로 일하면서 버텼다. 혼자 조용히 일하는 걸 좋아하는 그에게 늘 북적거리는 현장은 버거웠지만, 자존심으로 버텼다.

 

“처음에는 이 일에 적응하고 내가 택시 기사로 살아가는 게 목표였다면, 이제 적응이 되면서 내가 돈 때문에 비굴하지 않을 정도가 됐잖아요. 나이가 50세에 들어서면서, 왜?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왜 택시 기사들이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말 한마디조차 순화된 표현을 쓰는 은경 씨였지만, 이 질문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직업을 다른 여성들에게도 권하고 싶으세요?”

“고생은 내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권할 고생은 아닌 것 같아요.”

 

택시 노동자의 현실이 이러했다. 그래서 ‘회사와 안 친한’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같이 했다. 일하는 사람으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빼앗기는 걸 알면서 손 놓고 싶지 않았다.

 

4년만의 복귀인데, 엉망이 된 일터

 

택시 일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 않는다던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요즘은 택시 기사 하면 더 안 돼요.”

“왜요?”

“제 살 깎아 먹는 일이에요.”

 

지난 8월, 대법원의 부당해고 판결을 받고 택시회사로 복직한 날. 그는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이 해고된 4년 동안, 택시 일터가 엉망이 되었다고 했다. 2020년 1월, 택시 운송사업 전액 관리제(월급제)가 시행되었다. 사납금 제도가 아닌 월급제로 전환하라는 이 시행령은 택시 노동자들의 오랜 바람이었다.

 

회사는 택시 기사를 고용함에도 월급이 아닌 사납금을 고수했다. 기사들이 벌어 온 돈에서 ‘차 떼고, 포 떼고’ 사납금을 가져가는 이 임금 제도는 택시노동자의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회사가 사납금액을 올리며 기사는 밤낮없이 차를 몰아야 했다. 그간 택시의 나쁜 관례라 여겨진 합승, 속도위반, 승차 거부 등은 여기서 기인했다.

 

이제 월급제가 되었는데, 택시 일터는 왜 엉망이 되었을까?

 

▲ 택시 월급제가 시행되었지만, 회사가 근무시간을 하루 4시간 정도로 축소해버리고 추가 근무의 경우 또 다른 기준금(사납금)을 내게 하는 등 기사들의 수입은 오히려 줄었다. 2021년 세종시 국토교통부 앞에서, 완전 월급제 내용을 담고 있는 택시발전법(11조 2) 즉각 시행을 요구하는 농성에 연대한 신은경 씨와 그의 동료들. 택시 운전자의 소정 근로시간을 1주 40시간 이상으로 정하도록 한 이 규정은 올해 1월 서울시에서 시행됐지만, 다른 지역은 언제 시행될지 모른다. (신은경 제공 사진)

 

사실 사납금 제도는 20년 전(1997년)에 법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수십 년간 기준금이라 이름만 바꿔 유지됐다. 2020년 기준금(사납금) 제도 폐지가 법으로 다시 명시되자, 택시회사들은 기사들의 근무시간을 하루 4시간 정도로 만든다. 나머지 시간에 추가로 일을 해도 된다고 했다. 다만 회사와 계약한 근무시간 외 일을 한 것이니 그 금액은 일정 비율 ‘기준’을 삼아 회사와 나눠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기준금(사납금)이다.

 

격일제였던 은경 씨의 근무시간도 18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었다. 돈이 벌릴 리 없었다. 은경 씨는 첫 달 월급 명세서를 받아들고 퇴사를 결심한다. 4년을 싸워 돌아온 회사를 두 달 만에 관두고 만다.

 

“정책의 잘못이지요.”

택시회사의 편법을 처벌하지도, 관리 감독하지도 않은 정부를 두고 한 말이다.

 

“어떤 면에서 섭섭해요.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조금 더 싸우면, 언젠가 택시도 더는 이런 편법을 쓸 수 없을 텐데. 변화가 있을 텐데.”

 

택시 기사로 정년을 맞고 싶었다. 지금은 바랄 뿐이다. 동료들이 더는 사라지질 않길 바란다. 그리고 기다린다. 다시 택시 운전대를 잡게 될 날을.

기사입력 :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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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리 22/11/19 [20:33]
택시... 어렵다고 들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복직까지 해낸 것도 엄청난 일인데 안타깝습니다. 다시 운전대를 잡을 날이 오길 바라겠습니다.
ㅇㅇ 22/11/20 [12:18]
택시를 많이 안 타봐서 그런지 지금까지 여성 기사를 만난 적이 딱 두 번밖에 없는데.. 일단 안심이 됩니다. 노동 조건도 안심이 되어서 여성기사분들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22/11/20 [15:42]
월급을 월급답게 줘야지... 빨리 개선되면 좋겠네요. 택시 운전대를 다시 잡게되시길 바래요. 꼭 그날이 오길..
수영 22/11/23 [11:34]
잔잔하게 말씀하셨지만 내공이 깊은 분인 것 같아요. 이런 기사님이 운전대를 잡으셔야죠. 택시회사들 편법 문제가 부디 해결되길 바랍니다.
슬퍼 22/11/23 [20:42]
슬프다 이렇게 우리 생이 가는데 
그동안 나라는 너무 무능하다.
소쩍새 22/11/24 [12:40]
인생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뭔가를 해보려 해도 가진 돈이 없으니 해 볼 도리가 없다. 이때 몸 하나 성하면 할 수 있는 것이 택시기사이다보니 뛰어 들게 되는데 숱한 사람을 조그만 공간에서 맞딱뜨리게 되면 그야말로 온갖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언론에는 택시 기사가 당하는 것은 대부분 묻혀지고 승객들에게 불친절 운운 하는 내용만 보도되다 보니  택시기사들의 애환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더구나 여성 기사임에랴 어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숱한 일들이 많지 않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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