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모래판이 있다. 그 위에 올라서 있는 건 청샅바, 홍샅바를 맨 씨름 선수다. 이들은 몸을 맞대고 서로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해 1분 동안 경기를 치른다. 경기가 끝난 후 승자는 환호의 소리를 지른다. 세 개의 체급이, 체급과 상관 없이 경기를 치른 후 천하장사도 선발하며, 이들에겐 황금소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들은 여성이다.
여자씨름은 아직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최근 몇 년 간 여성 운동선수들이 주목 받는 흐름 속에서 그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올해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예능·교양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사이렌: 불의 섬〉에 씨름 선수인 김은별 선수가 등장한 일도 여자씨름을 알리는 일에 큰 몫을 했다.
![]() ▲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 중 임수정 선수가 씨름 경기에서 상대 선수를 들어올린 모습 (제공: 박재민 감독) |
이런 타이밍에 운명처럼 나타난 영화가 있다. 박재민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모래바람〉이다. 올해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이 작품은 얼마 전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으며, 임수정, 송송화, 최희화, 김다혜, 양윤서 5명의 씨름 선수들과 여자씨름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여자씨름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며 올해도 통산 97번째 우승을 차지한 38세 임수정 선수, 45세에 천하장사(2011년 제3대 천하장사)에 올랐으며 52세의 나이로 은퇴한 송송화 선수, 언니들을 롤모델로 삼으며 자신들만의 씨름을 하고자 하는 최희화, 김다혜, 양윤서 선수의 각기 다른 매력이 돋보인다. 또한 모래판 위 선수들의 거침없는 움직임, 잘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근육이 아니더라도 힘을 뽐내는 다양한 몸들, ‘여성’ 선수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여성서사.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진 〈모래바람〉은 많은 이들이 기다렸을 법한 그런 영화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여자씨름에 한 눈에 반해, 카메라까지 들게 됐다는 박재민 감독을 만나 〈모래바람〉이 만들어진 과정과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들어보았다.
-여자씨름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2017년 설 연휴 때 TV를 켰는데, 씨름 경기를 중계하고 있더라고요. 근데 그 씨름을 여자들이 하고 있었던 거에요. 여자씨름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경기를 보다 보니까, 선수들 중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송송화 선수였죠. 어려 보이는 선수들도 있었고요. 선수들 나이 폭이 넓은 게 신기하더라고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또 타투를 한 선수도 있고, 머리가 굉장히 짧은 선수도 있고. 여러 스타일의 사람이 섞여 있었는데, 엘리트 체육에서 보던 선수들과 다른 좀 ‘날 것’의 느낌이었어요. 그게 너무 좋았고요. 그 때부터 여자씨름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이 사람들을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어요.
-여자씨름과 사랑에 빠졌다 하더라도, ‘카메라를 들고 찍겠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잖아요. 원래 영화 제작을 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는지도 궁금합니다.
2016년이 회사 생활한 지 10년차였어요. 앞으로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지 혹은 해야 하는지 생각은 복잡한데, 막막하더라고요. 좀 침체되기도 했고 무기력한 상태였어요. 또 사회적으론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변화가 생긴다는 거에 기쁘고 힘이 나면서도, 자꾸 여성의 이야기가 ‘피해서사’로만 환원되는 걸 보는 게 좀 힘들더라고요. 다른 이야기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승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요.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는데, 여자씨름을 보고 ‘이거다’ 싶었던 거죠.
![]() ▲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모래바람〉의 박재민 감독과 임수정 선수 (제공: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워낙 영화를 좋아했어요. 영화 제작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싶어서 영화수입사에서 일하며 시나리오 쓰기도 배우고 그랬거든요. 이 업계를 떠나기 전에 한번은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 봐야겠다 했는데, 그게 〈모래바람〉이 된 거죠. 처음부터 영화를 연출하겠다는 건 아니었고, 프로듀서 역할을 하려고 했어요. 감독을 따로 구하려 했지만 여러 사정이 생기면서 ‘어떻게 하나’ 했는데, 다큐 만드는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원래 다큐멘터리는 꽂히는 사람이 하는 거다. 그냥 니가 해라.” 그렇게 감독을 하게 됐죠.(웃음)
-영화엔 5명의 선수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요. 국내 최초의 여자 실업팀 콜핑 소속이었던 임수정, 송송화, 최희화, 김다혜, 양윤서 선수죠. 어떻게 이들을 주인공으로 찍게 됐나요?
처음부터 임수정, 송송화 선수를 주축으로 생각하긴 했어요. 근데 송송화 선수가 2018년에 은퇴를 하고, 임수정 선수는 계속 이기기만 하더라고요.(웃음) 은퇴 이후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기도 했고, 또 이기는 이야기로만 구성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씨름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초등학생 이야기를 좀 찍어 보면서 이런 저런 방법을 생각했는데 쉽진 않았고…. 그래도 여자씨름 선수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계속 촬영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콜핑에 있던 최희화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김다혜 선수도 이적을 한 후 임수정 선수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는 일이 생기더라고요. 자신의 꿈, 롤모델이라고 한 임수정 선수와 대결하는 선수들의 성장을 보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묶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카메라가 따라다니면 선수들이 부담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선수들과 어떻게 소통했나요?
제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타입은 아니어서, 조심스럽긴 했어요. 카메라가 부담스럽다는 것도 아니까 최대한 방해가 안 되려고 했죠. 다행히 선수들이 카메라를 엄청 낯설어 하진 않더라고요. 지역방송이나 중장년 층 타깃인 방송에 종종 출연한 적도 있고, 관중 앞에서 경기하는 선수라 그런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초반에 카메라 없이 선수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선수들이 “누가 우리 얘길 궁금해 할까요?” 하더라고요. 나도 확답할 순 없지만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다. 여자씨름을 보고 감동 받고 힘을 얻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 했어요. 당신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요. 그게 선수들에게 어떤 믿음을 준 거 아닐까 싶어요. 선수들의 그 질문이 계속 영화를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어요.
-씨름은 아무래도 젊은 층보단 중장년 층이 즐기는 운동이라, 흥미로운 지점도 있었어요. 영화 속에서 할머니들 여럿이 씨름 보러 경기장에 들어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왠지 마음에 남더라고요. 한국 사회는 노인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굉장히 제한적인데, 씨름이 몇 안 되는 놀이문화 중 하나구나 싶었고, 할머니가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상당히 새로웠어요.
맞아요. 저 또한 그런 관객들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더라고요. (씨름 경기가 열리는) 지역들은 특히 문화생활을 즐기기 힘들어요. 중장년 남성들은 티켓다방 같은 데 가는 게 노는 걸로 되어버리고… 그에 반해 여성들은 더 할 일이 없죠. 논밭에서 일하는 거 말고요. 이런 상황에서 여자씨름이 그 여성들의 놀이문화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송송화 선수 이야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여자씨름이 중년여성들이 활력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거든요. 특히 중년인데 덩치가 좀 있고, 힘이 센 여성들이요. 사회에선 ‘드세다’며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여성들이, 씨름판 위에선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송송화 선수의 이야기는 감독 입장에서 흥미로우면서도 까다로웠을 것 같아요. 특히 은퇴 이후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모르니까, 이야기를 담는 입장에서 좀 염려됐던 부분도 있었을 것 같고요.
정말 그랬어요. 은퇴한다는 소식도 갑자기 들었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얘기는 자주 하셨지만, 정말 다음 해(2018년)에 바로 은퇴하실 줄 몰랐어요. 그렇다고 송송화 선수 이야기를 빼고 싶진 않았어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고, 그래서 계속 따라다녔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송송화 선수의 여자씨름을 향한 애정이 얼마나 큰 지 알겠더라고요. 여자씨름을 위해 계속 무언갈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담으면 되겠다 싶었어요.
사실 영화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도 굉장히 많아요. 씨름을 오래 한 만큼 여러 절절한 이야기들이 있거든요. 특히 “씨름을 통해서 내 이름을 찾았다”고 말했던 게 인상적이었어요. “씨름이 내 활력소”라고요. 자신을 살게 한 게 씨름이었기 때문에, 이 좋은 걸 다른 사람도 했음 좋겠다는 마음이 정말 크다고, 씨름을 통해 많은 걸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씨름을 위해 뭔가를 계속 하고 싶은 거죠.
![]() ▲ 영화 〈모래바람〉 중 임수정 선수가 천하장사가 된 후 황금소를 들고 있다 (제공: 박재민 감독) |
-임수정 선수 이야기 중엔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저렇게 대단한 업적을 쌓은 위대한 선수에게도, ‘여성’이기 때문에 자꾸 나이와 결혼 등이 압박이 된다는 게 참 씁쓸하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하고 그랬어요. 결국 선수와 어머니 모두 결론을 내진 못하잖아요. 뭐가 답인지 모르겠다고.
두 분 이야기가 실제론 거의 2~3시간이었어요. 많은 부분을 잘라야 했는데, 최대한 담백하게 하려고 했어요. 편집감독도 30대 여성이었는데, 이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편집점을 잘 잡아주었죠. 영화에선 잘 모르겠다며 고민했던 임수정 선수도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 후 GV 때 “올해 38살이고, 아직 짱짱하게 훈련하고 있고, 앞으로도 본인만의 씨름을 하겠다”고 했거든요. 선수들을 계속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사회 인식이나 시선이 어떻든 계속 성장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감독님이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 salimhealthcoop.or.kr)에서 열심히 활동을 했다고 들었어요. 살림은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몸, 건강, 돌봄 등을 함께 들여다 보고, 같이 나이 들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 가는 곳인데요. 그 경험이 〈모래바람〉을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을까요?
엄청난 영향을 미쳤죠. ‘살림’을 통해서 페미니즘을 배웠거든요. 그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기도 해요. 그 전까지는 ‘결혼해야 하나? 근데 하기 싫은데. 그럼 어떻게 살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누구랑, 어디서 이야기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근데 살림을 알게 된 후에 정말 많은 힘을 얻게 됐죠. 시야도 굉장히 확장됐고, 생활환경이나 좋아하는 것도 바뀌게 됐어요. 전부터 느꼈던 ‘여성서사’에 대한 갈증, 차별과 편견, 여러 불편한 지점들을 비로소 언어화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구체적인 지향점을 가지게 됐어요. 그러고 나니까, 대중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전형적인 여성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의 이야기를 보고 싶더라고요. 또 엄마나 마누라가 아닌 여성의 이야기, 여성이 원하는 정체성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여성 스포츠도 앞으로 더 주목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잖아요? 〈모래바람〉도 얼른 개봉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웃음)
-〈모래바람〉은 여성의 다양한 몸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특히 요즘엔 ‘여자들도 운동하고 근육 만들어서 강해지자’고들 하는데, 결국 또 ‘잘’ 만들어진 몸, 근육으로 다져진 보기 좋은 몸을 추구하고, 그런 몸들만 보여져서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 송송화 선수가 빨간색 콜핑 유니폼 입은 모습을 되게 좋아해요. 볼록하게 보이는 배, 좋지 않나요? 수많은 여성들이 그걸 감추려고 하는데, 그게 힘의 원천일 수 있잖아요. 근육으로 잘 만들어진 몸만 강한 몸이 아니라는 거, 그런 이야기들도 많아졌으면 해요.
![]() ▲ 영화 〈모래바람〉 중 콜핑 소속 선수들이 숙소에 모여 과일을 나눠 먹는 모습 (제공: 박재민 감독) |
-여자씨름을 몇 년 동안 지켜보셨는데, 그동안 변화가 있는지, 여전한 매력은 뭔지 궁금해요.
일단 여자씨름단이 ‘더’ 생겼죠. 그렇게 팀이 생겼기 때문에, 콜핑에 있던 5명의 선수들도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었던 거고요. 또 대중 미디어에서 여자씨름이 조금씩 보여지면서 인지도도 올라갔고, 팬도 많아진 것 같아요. 지금이 여자씨름 역사상 가장 팬이 많이 늘어난 시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여자씨름은 사실 많은 이들에게 열려 있는 운동이에요. 동호회부터 시작해서, 경기에 나가다가 선수로 선발될 수 있거든요. 아직 선수층이 두텁진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선수로 투입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거죠. 본인이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관심 있는 분들은, 대한씨름협회 사이트 들어가면, 각 지역 씨름협회 연락처가 있거든요. 문의하면, 어디서 씨름할 수 있다고 알려줄 거에요. 지금이 기회입니다. 도전해 보세요.
씨름은 상대와 싸우는 경기지만, 그런 경기치곤 안전한 운동이거든요. 어딜 치고 가격하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넘어뜨리는 거니까요. 또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싸움이기도 하고요. 작다고 무조건 지는 게 아니거든요. 정말 매력있는 운동이에요.
-영화 만들기 전과 만든 후, 감독님 스스로 변화된 부분이 있나요?
그 전엔 조급하고 불안했던 것 같아요. 30대 중후반인데 뭘 해야 하지 않을까? 인생에 어떤 성과를 내야 하지 않을까?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너무 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로 불안했거든요. 영화 만들면서도 그런 감정이 없진 않았죠. 7년 동안 만들었으니까, 힘들기도 했고요. 특히 영화가 완성되기 직전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도 옆에 사람들이 있어서, 기댈 수 있어서 버텼던 것 같아요. 그렇게 영화를 만들고 난 후, 지금은 후련해요. 그냥 나 스스로 만족하게 되는 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이 작품은 내 손을 떠났고, 이 작품이 갈 길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독자들이 어디서 영화를 볼 수 있을까요?
다가오는 여성인권영화제(9월 20일~9월 24일, 서울)에서 상영이 확정됐고,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10월 20일 ~ 10월 29일, 울주)에서도 볼 수 있을 거에요. 여러 영화제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영화 개봉도 하고 싶은데, 독립영화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배급지원이 없으면 사실 개봉이 어렵거든요. 그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잘 됐으면 좋겠네요.
기사입력 : 2023-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