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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고 남은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사회
‘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① 보훔에서 만난 한국인 노동자들
김인건   |   2023-10-02

2000년대가 지나면서 독일은 스스로를 ‘이민자 국가’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미 1960년대에 독일은 대규모로 이주 노동자를 불러들였지만, 당시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를 다시 떠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독일은 계속해서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했다. 경제적 필요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민자를 불러들인 경우도 있었지만, 동유럽의 붕괴나 유럽연합의 탄생 같은 사회적 변화가 인구의 이동을 야기했다. 난민 또한 이민자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 독일 인구 약 27%가 이민자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민 1세대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을 포함한 수치다. 독일이 스스로를 이민자 국가로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한편으로 이런 자기 고백은 이민자 없이는 독일 사회가 돌아가지 않으며, 앞으로도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미 많은 이주 노동자를 불러들였으며, 앞으로 더 많은 이민자를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이민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고민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독일 언론이 이민자 사회를 다룰 때 자주 인용하는 스위스 작가 막스 프리쉬의 문장이 있다. “우리는 노동력을 불렀지만, 온 것은 사람이었다.” 관념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매우 현실적인 말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필요만을 충족하는 노동력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난민도 마찬가지다. 생존 이후의 삶 또한 중요하며, 사회가 여기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사회 전체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총 6가지 주제로 다뤄질 이 연재에서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각기 다른 이유로 독일에 들어온 이주민 집단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번 연재를 통해 시대에 따라 변하는 독일의 이민자 정책이나 사회적 의식도 알아보겠지만, 이민자들의 욕구, 감정, 투쟁 등도 함께 다루고자 한다.

 

많은 한국계 이민자가 살고 있는 루허 지역의 현재

 

우리가 독일에 처음 도착한 것은 2012년 5월이다. 파트너와 함께 나는 인천에서 상하이를 경유해 17시간 정도 걸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선택할 수 있는 항공편 중 가장 저렴한 노선이었다. 기차를 타고 또다시 이동해야 했다. 날은 더웠지만 독일의 고속기차 ICE의 에어컨은 작동하지 않았다. 독일 기차는 티켓과 좌석 예매가 별도였지만, 그 사실을 안 것은 기차를 타고 나서였다. 북적이는 기차에는 우리처럼 독일 시스템을 잘 모르는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기차는 2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보훔에 도착했다. 이곳이 목적지가 된 것은 저렴한 생활비, 좋은 어학원 같은 실용적 이유였다. 나는 이 도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독일 생활의 최종 목적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학원을 다녔고 어학원 부속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어학원은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하고 소박한 주거 지역에 있었다. 사실 주택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썰렁하고 낯선 동네를 조용하고 소박한 공간으로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트램을 타고 10분 정도 가면 시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나왔지만, 번화가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전성기를 지나 점차 활기를 잃어가는 도시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이 도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 1960년 6월 1일 뮌헨 중앙역에 도착한 이탈리아의 이주 노동자들, 출처: 뮌헨 역사 박물관 홈페이지 


보훔이 위치한 루허 지역(Ruhrgebiet)은 서독의 대표적인 탄광 및 철강 공업 지대였다. 보훔의 마지막 탄광은 1973년에 문을 닫았지만, 도시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여전히 광산이었다. 보훔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산 박물관이 있으며, 루허 지역 곳곳에 갱도를 체험 방문할 수 있는 견학 코스와 박물관이 있다. 루허는 독일에서 인구가 많은 지역에 속하지만, 세련되고 활기찬 곳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독일과 다르게,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루허에 많은 한국계 이민자가 살고 있으며, 한인 교회와 한글 학교 또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허는 파독 광부들의 땅이었다.

 

1963년 12월 한국인 광부 243명이 루허에 도착했다. 1977년까지 약 8,000명의 한국인 남성이 탄광에서 일하기 위해 독일에 왔다. 광부 파견에 관한 독일과 한국의 협약은 “한국의 기술 발전 지원”과 “한국 광부의 직업 능력의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졌으며, 파견 노동자들은 3년짜리 노동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광부 일을 하다 독일에 온 사람은 드물었다. 좋지 않은 한국의 취업 시장, 가족 부양, 미래에 대한 진취적 도전 정신 등이 이들을 독일로 이끌었다. 땅속 깊은 곳의 작업장은 독일만큼 낯선 공간이었다. 훗날 이들 대부분은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된다.

 

파독 광부보다 파독 간호사 숫자가 더 많아

독일을 떠나지 않고 남은 한국인 이주노동자 ‘절반 가량’

 

1960~1970년대부터 보훔에 남아 있던 한인 중에는 간호사도 있었다. 1950년대부터 1976년까지 약 11,000명의 한국인 간호사가 독일에 왔다. 파독 광부보다 간호사 숫자가 더 많다는 것도 나에게는 새로운 지식이었다. 이들은 광부와 다르게 독일 전역으로 보내졌다. 독일에 온 대부분의 이주노동자 집단은 남성 중심이었다. 하지만 한국계 이민 1세대의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초기 한국 출신의 이주 간호사는 교회 조직이나 민간 조직을 통해 소규모나 개인으로 독일에 왔다. 그러다가 1966년부터 민간 차원의 대규모 모집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1971년부터는 독일과 한국 정부 사이의 공식 협정을 통해 파독 간호사 모집이 이루어졌다.

 

어학원을 제외하고 보훔에서 우리가 처음 알게 된 한국인 또한 간호사였다. 어학을 끝내고 대학 입학 전,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던 내 파트너는 은퇴할 시기가 가까운 노련한 한국 간호사 한 명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직 독일어가 서툰 내 파트너에게 병원에서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려 줬으며, 병원 밖에서 필요한 것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줬다. 간호사의 경우 광부들과는 달리, 독일에 남아 있는 경우 계속해서 간호사 일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탄광이 없어져도 병원은 없어지지 않았으며, 직업의 사회적 위치도 달랐다.

 

우리는 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기도 했다. 나는 보훔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오래전부터 집에서 직접 쌀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상상하기 힘든 노력 중 하나였다. 그와 그의 남편이 수십년에 걸쳐 이룩한 단독 주택의 정원에는 한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각종 채소가 자라났다. 그의 남편은 파독 광부 출신이었지만, 재교육을 통해 독일의 유명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은퇴한 상태였으며, 자식들은 다 자란 성인이었다. 그들 주변에는 독일에서 비슷한 삶의 과정을 겪은 한국인 공동체가 있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했던 일의 육체적 고단함, 당시로서는 너무 극명했던 문화적 차이, 인종차별, 이들이 한국에 송금한 돈으로 생활했던 한국의 가족들에 대한 서사는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졌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독일에서 번 돈으로 한국에서의 삶을 준비했던 것과 다르게, 독일로 건너온 간호사와 광부의 절반가량은 처음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도 독일에 남아 삶을 이어갔다. 루허에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이민자 집단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임금 고강도 노동 산업 유지 위해 ‘손님 노동자‘ 불러들인 독일

 

1871년 독일이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가 되면서, 석탄 지대인 루허는 독일 산업화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철광 산업을 위해서는 연료가 필요했고 이곳에는 석탄이 있었다. 석탄의 수요가 증가하자 광산은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탄광은 이주 노동자를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루허를 대표한 외국인 그룹은 폴란드계 이민자들이었다. 광부 중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 때 60%를 넘었다. 선주민과 다른 언어를 쓰던 폴란드계 이주민은 도시 내에 자신들만의 섬을 만들었다. 자신들만의 동호회, 신문, 노동조합, 은행 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 중 2/3는 독일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루허 지역의 선주민으로 동화되었다.

 

▲ 보훔의 광산 박물관, 붉은 박물관 건물 뒤로는 탄광을 상징하는 채굴탑이 있다, 출처: Christian Nawrot, CC BY-SA 3.0


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 서독의 경제가 다시 성장하면서, 탄광은 다시 이주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탄광뿐 아니라 산업 전체가 인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55년 12월 20일 독일 정부는 이탈리아와 처음으로 노동자 모집에 관한 협정을 맺는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농업 및 건설 분야에서 일하다 점차 다양한 중공업 분야로 투입되었다. 독일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스페인, 그리스, 터키, 포르투갈, 터키 등과 차례로 노동자 모집을 위한 협약을 맺는다. 그렇게 독일에는 ‘손님 노동자‘(Gastarbeiter)라 불리는 사람들이 오게 되었다.

 

원래 독일에서 이주 노동자를 부르던 명칭은 ‘프램트아르바이터‘(Fremdarbeiter)다. 이국적이거나 낯선 것을 표현하는 형용사 ‘fremd‘와 노동자를 뜻하는 ‘Arbeiter‘가 합쳐진 말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나치 시대 강제노동을 하던 이주 노동자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 사람들은 불편한 자신들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손님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주 노동자를 손님처럼 친절하게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주 노동자가 잠시 노동력을 제공하고 떠날 존재로 인식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주 노동자는 손님이었다.

 

손님들은 독일에 오기 위해 건강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전염병이 없는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독일에 온 이주 노동자 중 다수는 독일인이 거의 없거나 감독관으로 있는 작업 현장에서 자신들끼리 일했다. 독일인이 기피하는 직종에서 이주 노동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임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손님이었지만 독일인과 분리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은 이주 노동자들을 자신의 일상에서 분리해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했으며 차별의 시선을 생산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이주 노동자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던 이탈리아인들은 무질서한 다혈질의 어린아이, 또는 바람둥이로 여겨졌다. 디스코장이나 술집 중에 “개와 이탈리아인은 출입 금지“라는 안내를 붙인 곳도 있었다. 이방인에게 선의와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줬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국가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에게 기차역은 주말 모임의 장소였다. 기차를 타고 독일에 온 그들에게 역은 고향과의 연결을 상징했다. 주말마다 옷을 잘 차려 입은 이주 노동자들은 기차역에서 서로를 만났다. 많은 경우 이주 노동자들은 자국인끼리 교류했다. 자신들만의 문화 행사를 했고 자신들의 음식을 나눴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타국에서 같은 고향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교류하고 문화를 즐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주민들이 이방인과 섞이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기도 하다.

 

터키인 작가 네브잣 위스튄(Nevzat Üstün)은 독일인이 ‘아침이면 손님노동자를 데리고 왔다가 퇴근 시간이면 이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길 원한다‘고 썼다. 독일은 타국의 아이들이 젊고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는데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독일은 손님노동자 덕에 더 이상 자국에서는 유지될 수 없는 저임금, 고강도 노동 산업을 유지했고, 이는 독일의 안정적 경제 성장에 힘이 되었다. 따라서 독일은 노동력으로서 이주 노동자를 환영했다. 1964년 쾰른에 도착한 포르투갈 출신의 목수 아르만도 로드리게스는 공식적인 100만 번째 손님노동자로, 독일 정부가 준비한 소형 오토바이와 꽃다발을 깜짝 선물로 받기도 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의 이민사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는 암에 걸려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그는 독일 의료보험 공단으로부터 병가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그에게 그런 내용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독일에서 저축한 돈은 결국 병원비로 소진되었다. 그는 1979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선물로 받았던 소형 오토바이는 과거 서독의 수도였던 본에 위치한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물론 공보험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죽음 또한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렇다고 독일 내 이주 노동자의 삶이 비참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에 도착한 로드리게스는 독일을 “돈의 나라“라고 표현했다. 독일과 노동자 모집 협약을 맺은 국가들은 대부분 실업난을 겪고 있었으며, 출신 국가에 비해 독일의 임금은 매우 높았다. 이주 노동자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고향의 가족을 건사하고도 충분한 저축을 할 수 있었다. 이주 노동자의 상당수가 거대 사업장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급여 환경은 안정적이었다. 1972년 기준으로 이주 노동자가 500인 이상 사업장에 근무하는 비율은 41%였다. 독일인의 경우는 약 25% 정도만이 500인 이상 사업장에 근무했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는 대체로 교육이 필요 없는 저임금 분야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급여 수준이 높지는 않았다. 이들은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특별 수당‘이 주어지는 위험하거나 지저분한 일에 자원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더 많은 추가 근무를 했다. 1972년 월 186시간 근무 계약을 했던 이주 노동자의 경우 36%가 200시간 넘게 일했으며, 20%는 220시간이 넘게 일을 했다. 이런 결과로 1972년 이주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독일인 평균 임금과 비슷했다.

 

▲ 1987년 독일 쾰른에서 찍힌 터키 식료품 가계의 모습, 이제는 터키 식료품 가계를 독일 전역에서 볼 수 있다, 출처: 독일 연방정치교육센터 홈페이지


손님으로 끝나지 않은 노동자들, 독일 인구의 큰 비중 차지 

 

독일 정치인이나 언론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독일이 이민자 국가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이민자 국가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민자 국가로서의 독일의 이야기는 손님 노동자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들의 서사가 ‘손님‘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2021년 기준 독일 인구 중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의 비중은 27%로 약 2,20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75만 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터키계 독일인의 역사 또한 손님노동자로 시작했다. 92만 명의 이탈리아계도 마찬가지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계 인구 또한 약 5만 명에 달한다.

 

유럽 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기록을 담은 사진 에세이 “제7의 인간”에서, 존 버거는 이주 노동자로 왔다가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결정에 대한 확신이 없는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영구 정착을 통해 더 안정적인 삶을 위해 확고한 결단을 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제는 귀국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어요”라고 이야기한다. 존 버거가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이민자들의 정착은 끊임없는 자기 의심일 수밖에 없다. 내가 독일 사회의 일원인지, 이 사회가 나를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독일에 정착한 이주 노동자 1세대들에 관한 글에서, 심지어 그들의 자녀들에 관한 글에서도 이런 자기 의심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민자들이 자신의 정착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타국에 남아서 살아남는 일에는 언제나 많은 모험과 수고가 필요하며, 이런 모험과 수고에는 다른 사람을 경탄하게 만드는 능동성이 함께 한다. 내가 만나본 사람들의 삶도 그랬다. 광부들의 삶은 갱도가 끝나는 자리에서도 계속되었으며, 머물기 위해서는 도전을 해야 했다. 직업 교육을 통해 독일 대기업에서 일하게 된 사람, 대학에 진학해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대부분의 독일인이 한국을 잘 모르던 시절에 독일에서 한국 식당을 개업한 사람, 독일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이나 유학생을 위해 일하게 된 사람 등등.

 

지금 독일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 비중을 차지하는 터키인도, 생각보다 자주 마주치게 되는 지중해 국가 출신의 유럽인도 1960~1970년대 한국인과 비슷한 경로로 독일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독일에 온 지 수년이 지나서였다. 처음으로 기숙사를 떠나 살게 된 다락방의 아래층에는 나이가 지긋한 이탈리아 부부가 30년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우리가 살았던 다락방까지 빌려 자식들을 키웠다. 그 후 우리는 다락방을 벗어나 다른 도시 1층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의 위층에는 포르투갈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으며, 그도 여기에서 자식들을 키워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가까이 사는 동안 그들이 한국인과 같은 손님노동자 출신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손님노동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나는 서로 다른 국가 출신의 이민자 집단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처음 독일에 와서 독일인이 하지 않던 일을 대신하던 이주 노동자들의 부지런함, 고향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최소한의 소비만을 하던 검소함, 인종차별, 이탈리아 식당, 스페인 식당, 그리스 식당, 터키 식당, 한국 식당 등을 개업하거나 식료품 가게를 차린 이야기들, 자식 세대에 가서는 더 높은 교육 등을 통해 사회에 잘 통합된 서사까지. 어쩌면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많은 이주민들이 비슷한 서사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김인건. 대학 졸업 후 잠시 철학 교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평등’ 개념을 주제로 석사를 마쳤다. 지금은 ‘움벨트’라는 연구 모임에서 독일의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프로젝트 글쓰기와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언론사 해외통신원,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독일의 역사적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모습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기사입력 : 202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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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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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니귀 23/10/02 [22:42]
흥미로운 주제네요. 이민자의 정착은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라는 부분이 와 닿았어요
Lim 23/10/03 [16:37]
나도.. 이민자들의 정착은 끊임없는 자기 의심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참 와닿았어요
perero 23/10/19 [03:17]
1세대 이민자들의 높은 교육열이 불러온 어두운 면도 조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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