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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을 환대하던 독일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민자 국가’ 독일 사회의 경험⑦ 기본법 16조 망명권과 난민의 권리 (상)
김인건   |   2023-11-29

2016년 2월의 어느 목요일 밤, 체코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독일 동쪽 마을 클라우스니츠(Clausnitz)에서 100명가량의 성난 무리가 버스 한 대를 둘러쌓다. 버스를 둘러싼 사람들은 “우리가 국민이다!”, “꺼져라!”같은 소리를 지르며 증오를 표현했다. 버스에는 난민 숙소에 입소하기 위한 15명의 난민이 타고 있었다. 두 시간 가량 버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결국 경찰과 함께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해석은 '결국 15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무사히 숙소로 들어갔다' 같은 안도할 수 있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숙소로 들어가는 과정이 짧은 유튜브 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독일이 난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즉각적으로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다.

 

▲ 극우주의들에게 둘러싸인 난민 수송 버스의 모습. 2016년 독일 클라우스니츠. 출처: 유튜브 영상 캡쳐 https://www.youtube.com/watch?v=jyr367tv-jE

 

영상 속에서 경찰은 한 난민 청소년을 질질 끌고 숙소로 들어갔다. 경찰에 따르면 이 아이는 버스를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들어 상황을 자극했고, 나이 든 한 여성은 창문 밖의 사람들이 보란 듯이 침을 뱉었다. 경찰은 공포의 상황을 정리하고 난민들을 안심시키기보다는, 이들을 문제 상황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질질 끌고 가는 편을 택했다.

 

같은 해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철학자 케롤린 엠케(Carolin Emcke)의 책 『혐오사회(Gegen den Hass)』가 출간됐는데, 1장에는 해당 사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스스로를 국민으로 호명하며 증오의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대체 자기 앞에 있는 무엇을 또는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작가는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울고 있는 아이와 버스 앞줄에 앉은 겁에 질린 두 여성”, “서로 어깨를 끌어안은 채 한 사람은 눈물을 훔치고 있고 다른 사람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있는 두 여성의 모습.”

하지만 혐오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눈 앞에 개별적인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만들어 낸 괴물 같은 ‘적’이 존재할 뿐이다.

 

케롤린 엠케는 독일 사회에서 최근 몇 년 사이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거리낌 없이 증오를 표출한다고 말이다. 2015년 난민에 대한 ‘환영문화’(Willkommenkultur)를 자랑하던 독일에 순식간에 난민에 대한 증오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서, 혐오가 만연해지는 사회의 모습을 경고한 엠케의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최근에 책을 다시 읽으니, 머리말의 한 문단이 눈에 밟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인간에게는 자기와 다르거나 낯선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심리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무조건 혐오나 증오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경우 그것은 일종의 거부로서 표현되며, 대게 사회적 관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가 관용을 너무 지나치게 내세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케롤린 엠케, 『혐오사회』 머리말 중)

 

노골적인 혐오는 정말 최근 몇 년 사이에 고개를 든 것일까. 2015년에 일어난 독일 사회의 급작스러운 변화(난민에게 국경을 개방)만 본다면 엠케의 진단은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돌이켜 가까운 과거만을 살펴봐도 난민을 환영하는 목소리, 사회에 만연한 증오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더 컸던 순간은 오히려 찰나와 같은 것이며, 폭력과 혐오는 때만 되면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던 것 같다.

 

"나치 때 박해 받았던 독일인들, 타 국가에서 망명의 권리 덕에 살았다"

단서 조항 없이 기본법에 망명 권리 포함

 

1990년대 초, 독일에 망명 신청을 하는 사람의 수가 급증했다. 1992년에는 최고조에 달해 직전 해보다 두 배 늘어난 44만 명이 망명을 신청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발칸반도에서 들어오는 난민의 숫자가 증가했다. 1992년 여름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를 대상으로 벌인 인종 청소로 인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22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그 해 독일 난민 신청자의 1/4이 발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루마니아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인종차별과 테러를 피해서 온 로마(집시)족도 많은 수를 차지했다.

 

▲ 1992년 폐허가 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한 음악가, 출처: Mikhail Evstafiev,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43707 

 

1990년 통일 이전의 서독을 기준으로 본다면, 1986년부터 독일은 이미 유럽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받는 국가였다. 1992년 슈피겔 기사에 따르면 유럽공동체(EC) 망명 신청자의 60~70%가 독일로 왔다. 1949년 만들어진 서독의 기본법 16조 a는 “정치적 이유로 박해를 받는 사람은 망명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일의 헌법 역할을 하는 기본법을 만들었던 정치인들은 망명자의 출신국이나 종류를 제약하는 단서 조항을 달 것인지를 논의했다. 하지만 나치 때 박해를 받았던 독일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보장된 망명의 권리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 망명의 권리는 단서 조항 없이 기본법에 포함되었다.

 

유럽의 1992년 여름은 여유를 즐기기 위한 부유한 서유럽인의 휴가 행렬과,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움직이는 난민의 행렬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알프스 주변 호수의 휴양 도시들은 관광객의 눈에 난민이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부유한 서유럽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대륙에서 가장 큰 난민이 발생했지만 책임감 있는 대책을 만들지 않았고, 난민을 어딘가로 밀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행동했다.

 

당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대부분 난민이 들어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독일은 그렇지 않았다. 기본법에 망명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는 망명 신청자들에게 숙소와 의료 지원을 보장하고 있었다. 거기다 1960년대 말 손님 노동자로 왔다가 정착한 유고슬라비아계 이주노동자가 많았던 것도, 발칸 난민이 독일로 오는 것을 용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난민이 들어왔다는 것과 국가와 사회가 난민과 함께 살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난민 숫자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망명의 권리’는 이미 논쟁의 대상이었다. 1992년 극우주의자들의 테러가 폭발하면서, 그것을 지켜보던 사회는 기존 기본법이 보장하던 권리를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1992년 여름의 광기와 후퇴하는 난민의 권리

극우주의자들의 테러, 동조하는 지역민, 방관하는 지방정부

 

이 연재의 다섯 번째 기사에서 1990년대 초 빈번하게 발생했던 난민과 외국인에 대한 극우주의자들의 테러가 이미 소개되었다. (관련 기사 https://ildaro.com/9765) 그 중 1992년 8월 로스톡(Rostock)시의 리히터하겐(Lichtenhagen) 지역에서 발생한 테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외국인을 향한 가장 끔찍한 테러였을 뿐 아니라, 난민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돌보지도 않은 국가 행정의 안일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리히터하겐에 위치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 중앙 망명 접수센터를 둘러싸고, 네오나치와 이에 동조하는 지역민은 증오와 광기의 축제를 벌였다.

 

▲ 1992년 8월, 로스톡-리히텐하겐 지역에 위치한 중앙 망명 접수센터에 극우주의자들 200여명과 지역주민들까지 약 2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외국인/난민 혐오범죄에 가담했다. 난민과 외국인노동자들이 기거하는 건물에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 영상 출처: 하인리히 뵐 재단 https://boell-mv.de/de/lichtenhagen


그 건물에는 중앙 망명 접수센터와 함께 임시 숙소가 있었다. 망명 신청을 위해 임시로 머무르는 난민을 위한 것이었고, 최대 32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접수 절차가 완료되면 신청자들은 다른 지역의 숙소로 보내졌다. 1990년 말에 만들어진 접수센터는 한 달에 평균 20명 정도의 신청자만을 처리했다. 하지만 신청자 숫자가 급증하면서 1992년 6월에만 약 1,300명의 난민이 접수센터로 왔다. 그러자 상당수의 난민은 숙소를 배정받을 수 없어 센터 밖 풀밭에서 노숙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다수가 루마니아계 로마족이었다. 거리에서 지내는 난민의 숫자가 300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텐트도, 화장실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은 소음, 구걸, 절도, 쓰레기 문제 등으로 시에 민원을 제기했다. 이미 이곳에서 사회적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시 정부와 주 정부는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거리에 난민을 방치해서 난민이 이곳으로 와도 좋은 대우를 해주지 않을 것임을 전시하려 했다. 그들은 난민들이 갈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사건이 있기 전, 극우주의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행동을 예고했고 적극적으로 동조자를 모았다. 1992년 8월 19일 로스톡시의 지역 신문에는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우리는 리히터하겐을 정리할 것이다. 뜨거운 밤이 될 것이다,”라는 익명의 극우주의자가 한 발언이 소개되었다. 다른 신문에도 계속해서 폭력을 예고하는 젊은이들의 발언들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예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 22일 토요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약 2,000명이 센터 앞으로 모였다. 상당수가 구경하러 온 지역주민이었다. 그 중 200명 가량의 청년들이 건물의 창문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에서 온 극우주의자들이 여기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점점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들은 건물에 화염병까지 던졌다. 주민들은 상황을 말리기보다는 박수를 치며 상황을 즐겼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현장 주변에 있던 매점은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높은 하루 매출을 기록했다.

 

토요일에 시작된 사태는 월요일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난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같은 건물에 거주하던 베트남과 모잠비크 이주 노동자들은 마지막까지 방화와 폭력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사이 폭력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도 늘어나 가장 많을 때는 약 1,200명가량이 1,600명의 경찰과 대치하며 내전과 같은 상황을 벌였다. 외신은 1938년 11월 나치가 유대인 시설과 상점을 총공격했던 “수정의 밤”과 3일간 벌어진 폭력을 비교하기도 했다. 비록 1992년의 폭력이 1938년처럼 독일 전 지역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리히터하겐의 망명센터 앞에서도 1938년처럼 깨진 유리 조각이 반짝였고 불길이 건물을 휘감았다.

 

혐오와 증오의 축제는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테러는 이전부터 계속되었으며 극우주의자들의 폭력에 동조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구 동독 지역에서 외국인에 대한 혐오의 목소리는 빠르게 힘을 얻고 있었다. 슈피겔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문제 때문에 벌어지는 극우의 폭력을 이해한다”고 답한 응답자가 1991년 12월에는 24%였지만, 1992년 6월에는 38%였다. ZDF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일에 너무 많은 외국인이 사는 것은 문제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구 동독 지역에서는 1992년 5월 51%였던 것이 6월에는 60%까지 올랐다. 구 서독 지역에서는 같은 응답 비율이 35%에서 40%로 증가했다.

 

구 동독 지역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다. 구 서독 지역과 다르게 외국인과 섞여서 산 경험의 부족, 통일 이후 불안정해진 사회보장 시스템과 높은 실업률 등이다. 리히터하겐 지역은 실업률이 높았던 로스톡시에서도 특히 실업률이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많은 청년이 폭력에 동참한 것은 구 동독 시절 국가의 청년 조직을 통해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던 동독 지역의 젊은이들이 통일 이후 사회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이런 분석을 읽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수긍이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난민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없었던 사회 전체에 대한 변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1965년 독일로 망명한 이란 출신의 작가 바만 니루만트(Bahman Nirumad)은 “독일에 살고 있는 약 6백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에게 자신의 육체와 삶이 이 나라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다.“며 난민과 외국인이 느끼는 두려움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독일 정치는 난민과 외국인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거나 극우의 목소리에 강력히 대처하기보다는 난민 유입을 제약하는 편을 택했다. (하편에서 계속)

 

[필자소개] 김인건. 대학 졸업 후 잠시 철학 교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평등’ 개념을 주제로 석사를 마쳤다. 지금은 ‘움벨트’라는 연구 모임에서 독일의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프로젝트 글쓰기와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언론사 해외통신원,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독일의 역사적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모습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기사입력 :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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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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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 24/01/03 [23:12]
연재 정말 반갑게 읽었습니다.
어쩜 독일은 일본과 그리 다른지.. 반성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 사회를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걸 여실히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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