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흐르는 눈물 속 웃음같은 것

만화리뷰-박소희의 <멍>

박희정 2004-01-04

요즘 같은 불황 속에서 권당 2만5천부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는 순정만화가 있다. 우리 나라에 아직도 ‘왕자님’이 존재한다는 독특한 설정을 무기로 하는 로맨틱 코미디물 <궁>이다. 높은 판매고를 바탕으로 연말의 <우리 만화대상>에서 상도 하나 거머쥐었고, 곧 영화화를 위한 판권계약도 진행 중이다. 작가 박소희는 이 시대의 잘 나가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라기보다는 개그)물을 통해 상업적인 성공을 일궈냈지만 사실 박소희의 재능은 상업적 장르에 국한되진 않는다. 천계영에게 <브라이드>가 있다면, 박소희에게도 가볍지만은 않은 그녀의 특별한 재능을 밀집시켜 보여주는 단편이 있다. 바로 데뷔작인 중편 <리얼퍼플>(총3권, 서울문화사)에 실린 <멍>이라는 작품이다.

<멍>은 자폐아를 가진 스물여섯 비혼 엄마의 이야기다. 혜인이 비혼모가 된 사정은 자세하게 이야기 되진 않는다. 그저 오가는 말들 속에서 그녀가 임신한 아이 때문에 사랑했던 남자와 헤어졌다(그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쩌다 임신하게 된 아인지는 몰라도 혜인은 아이를 포기하는 것보다 사랑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 수민은 자폐증이다. ‘인내’가 필요한 병. 돌아보지도, 웃지도 않는, 아니 말조차 건네지 않는 아이가 언젠가 아주 자그마한 변화라도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상대가 아무리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화를 내거나 다그쳐서도 안 된다.

변화를 싫어하는 자폐아의 특성 탓에 혜인은 늘 똑같은 머리와 옷차림이어야 한다. 흑백사진의 한 장면처럼, 멈춰버린 일상. “대체 이 작은 가슴에 얼마나 큰 멍이 들어 있는 거니?” 혜인은 수민에게 묻지만, 정말로 커다란 멍은 혜인의 가슴에 들어 있다. 그 멍을 깊게 하는 건 아이의 병만은 아니다. 자폐아를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 여전히 사랑하는 남자의 결혼식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 상황들은 중첩되면서 혜인 내부의 갈등은 커져간다.

“나를 좋아해줘, 가슴이 춥지 않게 나를 좀… 사랑해줘.”

외롭고 추운 마음을 토해 낼 곳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 속뿐이다.

혜인이 사랑하는 남자의 결혼식에 신부의 부케를 받기로 나선 건 변화, 혹은 행복에 대한 갈망이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민의 돌발적 행동에 부케는 혜인의 손을 벗어나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부서진 꽃다발. 수민을 안고 돌아 오는 길을 적시는 비. 그러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옛 가요에 장단 맞추듯 수민이 보여주는 웃는 얼굴에서 혜인은 일상의 노곤함을 잊을 행복을 찾는다.

<멍>은 일견 건조해 보이지만, 독자들에게 감정을 적극적으로 전달한다. 중편집 <리얼퍼플>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 ‘멍’이라는 외마디 단어를 발음 할 때의 분절되고 쓸쓸한 느낌. 햇빛에 아스라이 바스라질 것 같은 그림체 또한 슬픈 감정을 배가시킨다. <리얼퍼플>같은 경우 때론 감정이 과해져 신파로 흐르기도 하지만 <멍>은 적절한 선에서 거리 조절이 잘 된 작품이다. 자폐아 아이를 둔 스물여섯 비혼 엄마의 특별한 일상이지만 이 작품이 지독히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어떤 감정의 호소하기 때문이다.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 돌아보지 않는 어떤 것,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손을 흔들어야 하는 것. 힘들어 울면서도 의미 없이 던져진 일에서 무심코 희망을 발견하고는 또 다시 행복을 기대하는… 어쩌면 어리석을지도 모르는 일들의 반복. 이 작품은 그런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삶이란 흐르는 눈물 속의 웃음 같은 거라고.

<궁>의 박소희와 <멍>의 박소희는 매우 다른 감성을 보여준다. 어느 한 쪽만의 작가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어쩌면 다른 한 쪽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을 가지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일까. 개인적으로 <궁> 이후의 작품이 너무나 궁금하다. <궁>이 로맨스물로 상업적 성공을 이룬 작품이라 해서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멍>에서 보여줬던 진지함과 작품의 완성도는 남다른 것이었고, 그것이 소 뒷걸음 질 치다가 쥐 잡은 격으로 나온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박소희가 보여줄지도 모르는 새로운 여성만화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정말로 좋은 작가를 얻게 된 것인지, 잃게 된 것인지는 그 때 가서 판단해도 늦지 않다.


기사입력 : 2004-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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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 04/01/05 [00:04]

왠지모를 따뜻한 느낌.. 
좋네요.
명진 04/01/05 [09:55]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브라이드* 너무 멋진 단편이에요.
천계영의 *브라이드*에 견줄만하다면 꼭 봐야겠어요.
박소희의 *궁*은 유명하다고 추천받아서 저도 봤는데.
재미는 있지만 소장하고 싶은 만화는 아니었죠.
헬렌 04/01/06 [22:40]
박소희의 단편들은 섬세한 만화죠.
기자님도 그런 만화들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저도.
클라우드 04/01/08 [13:22]
전부터 기자님의 만화가와 만화에 대한 비평글을 유심히 봐왔어요. 한혜연에 대한 평도 참 좋았지만, 박소희의 단편 <멍>에 대한 소개와 작가에 대한 평도 마음에 와닿는 군요.

이런 작품이 갖는 작품성이 "소 뒷걸음 질 치다가 쥐 잡은 격으로 나온"게 아니라는 것에도 동의해요. 결과를 볼 수 있을지 확실지는 않아도, 가능성에 주목하고, 주목해주는 것이 독자들의 역할이기도 하고,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재미이기도 하죠.
바라나시 04/01/19 [08:21]
동네에 있는 만화가게 여러군데를 갔는데도 없어요!

음음.. 이쯤되면... 사서 읽어야 하는건지..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말이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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