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 모습을 사랑한다”

17살, 가장 바라는 것은

제나링크 2006-02-13

“나 커서 대통령이나 할까봐.”
“그럼 네 옆엔 말 그대로 영부인이 있는 거네.”

우스개 소리였다.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동시에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처음엔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듯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날 이해해주려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런 얘길 꺼내면 항상 인상을 찌푸리던 터라 이해해주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반응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런 말이 던져졌다.

“네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레즈비언인 건 몰랐어.”
무슨 말이지? 장난이겠지 싶었는데 그 이유까지 듣고는 고개를 숙이게 된 나였다.

친구가 말한 그 이유는 “거부감”이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그 자체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레즈비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나면 거부감이 든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익숙했던 내 정체성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거부감을 준다니. 친구의 그 한 마디는 레즈비언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그 분명한 사실을 뒤로한 채 오해로 더럽혀진 편견을 대변해주고 있었고, 굳이 날 레즈비언이라고 단정지어야 할까 하는 자책감마저 들게 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약속이 생겨 영화를 보러 갔다. 한참 인기몰이중인 영화는 이미 매진된 지 오래고 결국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 라는 영화를 고민 끝에 보게 됐다. 매진이 안된 영화는 그뿐이었는데, 한 마디로 그럭저럭 가족애를 담은 로맨틱코미디 영화였다. 재미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스톤 가족의 넷째 아들 태드와 그의 남자친구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내내 따뜻함이 느껴졌다. 게이커플인 그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가족의 따뜻함 때문이다.

아들이 게이인 게 껄끄럽지 않냐는 말에 “난 사실 내 아들들이 모두 게이이길 바랬어.” 하고 농담을 던지는 장난 어린 아버지의 눈빛, 슬퍼하는 아들 태드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지극히 정상이야. 여기 있는 어떤 꼴통들 보다.” 라고 울먹이며 말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내 마음 한 구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눈물이 났다.

20살이 가까워질수록, 아니 점점 숨기기에 힘들어질수록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커지고 불안감이 날 지치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났던 건 너무나도 바래왔던 모습들에 대한 동경심에서였지만, 사실은 보수적인 우리 가족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을 따뜻함이 부러워서기도 했다.

내 정체성에 대해 확신이 생겼을 때 내가 가장 원했던 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가족에게 나 그대로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도, 지금도, 간접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평소 성소수자에게 야박한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난 동성애자들에 대해 너무나 큰 관용을 베푸는 첫째 딸로 보일 뿐이었다.

여자친구에게 쓰는 편지가 한없이 떨려 내가 처음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혹은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시도해보려 한 그 잠깐의 시간에도, 나는.

“난 여자를 좋아해.”라는 의미를 담고서 “나 레즈비언이야.”라는 말로 그 모두를 포함시키려 했었다. 사랑보다 구체적인 사랑의 의미가 더 중요하듯이,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보다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내용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이제 더는 막연한 어린 나이가 아닌 날 위해 레즈비언이라는 이름대신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여자를 좋아하는 이런 내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

기사입력 : 200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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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06/02/14 [19:36]
약간의 인정과 약간의 따뜻함, 약간의 배려, 약간의 이해..
모두에게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십대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들리네요. 조금 안타깝기도 하지만요.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나요? 
사라 제시카 파커가 연기변신했다는 얘기밖에 아는 정보가 없었는데, 
함 보고 싶네요.
feel 06/02/15 [15:05]
사실 이반이란 말이 많이 퍼진 것도 레즈비언이라는 호칭에 대한 불편함, 거부감 같은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반이면서도 레즈비언은 왠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말이 안 되지만) 사람도 많은 것 같구요. 저는 역으로 레즈비언이라고 저를 많이 이야기하려고 더 노력하게 되는 것도 그 이유인 것 같아요.
KMH 06/02/16 [13:58]
이반감성 코너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레즈비언이라는 표현이 "내 정체성의 이름"이고,
사람들의 거부감이 "오해로 더럽혀진 편견" 때문이라고,
님의 말들이 와닿습니다.
제나링크 06/02/17 [03:12]
조금더 자신에대해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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