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레즈비언이 10대의 현실과 만나다

‘10대 이반과 학교’ 강좌 후기

이정인 2006-02-14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10대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머리 속엔 당시의 기억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도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해보려 해도 쉽게 말리 떨어지지 않는다. 성적에 대한 부담 때문에 초조했던 기억이나, 동성친구를 좋아하면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가요를 자주 불렀던 것, 그리고 감옥 같은 학교 안에서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야 했던 일상들이 사진처럼 펼쳐질 뿐이다.

생각해보니 같은 반 여자친구를 좋아하면서 꽤나 애를 끓였다.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하게 되다니, 이상한 일인 것 같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을 무작정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속으로는 사랑을 말했지만 겉으로는 친한 친구로만 보이도록 속마음을 포장해야 했다. 못 견딜 정도로 감옥 같은 학교였지만, 좋아하는 그 친구를 볼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도 만날 수 없는 ‘이반검열’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주최한 2회 레즈비언 자긍심 찾기 강좌 ‘나는 동성애자다, 나는 여성이다’ 프로그램의 네 번째 강좌 “너 이반이지? -십대 이반과 학교”에 참여하면서, 중고등학교에 다녔을 때의 생각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10년 정도 시간 차이가 있는 예전 나의 중고등학교 생활과 현재 십대들의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이반”이나 “레즈비언”을 검색하면 수백 개의 커뮤니티가 뜨고,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이 퍼져있는 반면, 편견과 차별이 깨지기를 기대할 만큼의 변화 역시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좌를 들으면서 우리 중고등학교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강좌는 여성영상집단 ‘움’에서 제작한 비디오 다이어리 형식의 <이반검열> 상영으로 시작됐다. <이반검열>을 통해 현재 중고등학교의 십대 레즈비언이 겪는 힘든 일상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촬영 당시 중학생이던 “천재”라는 이반 소녀는 학교에서 이반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는 것에 대한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반’처럼 보이는 학생들을 데려다 찍어놓고 감시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술, 담배를 하는 것보다 ‘이반’인 것이 알려지면 처벌을 더 심하게 받아야 하고, 심지어 하교 후에 ‘이반’ 친구들끼리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한단다.

영상에서 천재가 말한 대로 ‘사생활이 침해’되고 있고, 도덕 시간에 배운 ‘인간 존중’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이라면,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자유’도 없다. 좋아한다는 말도 건네지 못했는데 좋아하던 친구가 전학 가는 날 천재는 친구의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백도 못했다는 이야기를 조용히 되풀이하던 천재의 마음에 왠지 감정이입이 되어 내 마음까지 아렸다.

“이제야 나 자신을 찾은 것 같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공지훤 활동가는 ‘10대 이반 학교 내 차별사례 수집’ 경과에 대해 설명했다. 이반을 문제아처럼 묘사한 가정통신문 내용, 이반친구들끼리 만든 인터넷 모임이 학교에 걸려서 부모님까지 학교에 모셔가야 했던 사례, 커트 머리인 학생들에게 긴 머리를 강요한 사례, 사귀던 사이를 떼어놓고 정학처리와 함께 억지로 전학을 가야 했다는 사례, 그리고 수업 중에 선생님이 동성애자를 “더럽고 역겹다”고 말했다는 사례 등.

과연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차별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십대 이반들에게 가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십대 이반들의 어려움을 고민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인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측은 십대들과 꾸준히 만나 기자회견과 간담회를 기획 중이라고 한다.

강좌에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또 다른 십대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꼬마 HJ”는 긴 머리 스타일에 소위 이반의 ‘티’를 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학교에서 이반이 겪을 수 있는 시달림으로부터 다소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러나 겉으로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 마음의 고통까지 덜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눈치 빠른 친구들 때문에 꼬마 HJ는 종종 의심을 사기도 하는데, 예전과 달리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가주는 것이 다행스럽지만 심장이 쿵쿵 뛸 만큼 당황스럽다고 한다.

학교에서 직접적으로 ‘이반검열’을 당하면서 받는 억압이나 차별말고도 선생님의 호모포비아적 발언 역시 상당히 문제라고 했다. 꼬마 HJ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인상적인 발언을 했다. “이성애자라고 생각했을 때 혼란스러웠고, 이제야 나 자신을 찾은 것 같다. 내가 10대라는 이유만으로 내 정체성이 일시적이라고, ‘가짜’라고 말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라고.

기사입력 : 2006-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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