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 이반? 나는 나일 뿐

레즈비언 집단 안에서도 차별받는 하위집단

슬리퍼 2007-05-17

‘팬픽 이반’ 겉모습의 3대 요소는 칼머리, 힙합바지, 피어싱.
‘팬픽 이반’의 글쓰기에 자주 등장하는 3대 단어는 붉은 장미, 혈(血), 죽음.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어하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즐거운 마음과는 반대로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팬픽(fan fiction) 이반’을 둘러싼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그들을 향한 조롱과 비난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차별 받아 온 레즈비언 집단 안에 또 다시 비난과 차별에 노출된 하위집단이 발생한다는 것, 그 자체로 기분이 꺼림칙하다. 하지만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편견이란 게 다 그렇듯, ‘팬픽 이반’을 향한 편견 속에도 그들을 향한 그릇된 정보가 판을 친다는 점이다.

팬픽 이반이면서 팬픽 이반이 아닌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팬픽 이반이다. 온라인을 통해 같은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친분을 쌓았다. 팬픽과 야오이를 읽고, 썼다. PC통신에서 모 아이돌 그룹의 팬픽 동호회 만들고 운영하기도 했다. 나의 정체화 과정에서 팬픽과 야오이가 주었던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팬픽 이반이 아니기도 하다. 나는 칼머리를 하지 않았고 힙합바지를 입지 않았다. 10대 시절 나의 글들이 비록 지나친 자기연민으로 넘쳐나기는 했으나, 흐드러진 장미나 검붉은 피가 전하는 멜랑꼴리와 절망을 담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온라인 친구는 꽤 있었지만, 같은 학교 안에서 드러나는 이반 아이들과는 거리를 유지했다. 오히려 학교 안에서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자 약간 왕따 기질이 있던 아이로, 내가 아이돌 그룹의 팬이라는 것조차 아무도 몰랐다.

‘그럼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을 한동안 했다. 사람들이 팬픽 이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을 조롱할 때면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어 울적했지만, 한편으로는 남의 일 같았다. 팬픽 이반이되 팬픽 이반이 아닌 존재라니 뭐, 말장난인가. 결국 내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던 것 같다. 정해놓은 틀에 딱 맞는 존재란 없다는 것. ‘그럼 나는 뭐지?’에 대한 대답은 ‘나는 그저 나지.’ 밖에 더 있겠는가.

배제와 혐오의 이유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불편한 레즈비언도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유행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더니 정말, 팬픽 이반의 화려했던 시절도 끝났다. 아이돌계의 팬픽 창작도 원활하지 못해서, 고급 퀄리티를 보장하는 새로운 팬픽에 대한 갈증을 느낄 정도다(!) 이렇게 칼머리는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팬픽 이반에 대한 악감정은 여전해서, ‘나는 나!’라는 외침에 대해 ‘역시 생각 없는 팬픽 이반이로구나!’라는 반응을 보낼 사람들도 있으리라.

팬픽이나 야오이를 접하지 않은 레즈비언들이 팬픽 이반을 싫어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팬픽 이반의 독특한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 팬픽 이반이 레즈비언의 존재를 가시화시켰기 때문에, 잠자코 살아가는 레즈비언들조차 쉽게 차별에 노출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

또는 너무 쉽게, 진지한 고민 없이 자신을 이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생각 없이 ‘이반을 하면서도’ 갖은 ‘똥 폼’은 다 잡는다는 것. 아이돌 그룹의 남성 멤버들을 커플로 만드는 망상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로 자신을 정체화할 수 있겠냐는 것 등등.

심정적으로 팬픽 이반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것까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혐오의 이유를 낱낱이 뜯어보면, 정당하지 못한 것들도 많다.

포용되지 못하는 자유

만화를 좋아해서 코스프레를 하고, 클럽에 갈 때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일본문화를 좋아해 ‘니뽄삘’ 패션을 고수하는 등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연결시키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어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서 그들의 외모까지 따라 하고 싶을 수도 있는 일이다.

반면 힙합을 입고 피어싱을 하지만 이반이 아닌 경우도 많았고, 팬픽을 읽는 이반이지만 나처럼 칼머리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너무 튀는 취향을 갖지 않는 것, 남들과 그럭저럭 비슷하게 사는 것만을 요구한다면 너무 심심하지 않은가. 게다가 팬픽 이반의 눈에 띄는 외모로 레즈비언의 존재가 가시화된 게 문제가 아니라, 가시화된 레즈비언을 차별하는 우리 사회가 문제이지 않은가.

또한 이성의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과 실제 삶 속에서 동성의 상대에게 이끌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레즈비언 중에 남자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팬픽 이반이 남자 연예인을 좋아하는 게 문제라는 말 속에는, 사실 그 남자 연예인이 다름 아닌 아이돌 그룹이라는 점에 대한 빈정거림이 녹아있는 것 같다. 소위 아이돌 그룹은 연예산업 속에서도 좀 하등하고 저질인 연예인으로 꼽히곤 하니까.

하지만 아이돌을 좋아하는 문화를 왜 저급문화로만 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남자와 남자를 짝짓고 그들의 실제 관계가 어떠할지를 궁금해하는 것이, 레즈비언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이미 아이돌계에서는 팬들의 반응을 노려 기획사에서 의도적으로 커플링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때론, 공수(攻受) 구분이 확실하고 폭력과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팬픽과 야오이 문화를 즐기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고민이 될 때가 많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팬픽 이반들이 꽤 되리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이미 팬픽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인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고, 대안적인 팬픽과 야오이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길

10대 시절을 돌아볼 때면, 나는 약간의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다.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기까지의 지난한 시절, 그 당시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동성을 향해 이끌리는 경험을 받아들이기까지 숱한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처음 동성 친구를 좋아하게 됐을 때 ‘이건 무조건 비정상, 변태적인 일이야.’라는 생각을 넘어서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팬픽과 야오이는 나의 정체화 과정에 도움이 됐다. 동성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팬픽 문화가 보다 쉽게 열어주었다. 그렇다고 동성의 상대를 쉽게 좋아할 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팬픽을 너무 읽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닐까?’라는 또 다른 고민에 부딪쳐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친구들을 떠나 보냈다. 20대가 되고 대학에 가면서 한 차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다시 한 차례. 그들은 팬픽은 읽되 이반정체성을 버리거나, 팬픽도 읽지 않고 레즈비언 친구들도 만나지 않는 감행을 통해 이성애자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이 팬픽 이반이 처음에 이반 정체성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치기만 부렸던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혼적령기’를 맞은 레즈비언들이 애인과 친구들을 결혼체제 속으로 떠나 보내듯, 이성애 중심의 우리 사회가 이반 정체성을 버리게 만들었던 것뿐.

한 집단이나 문화의 어떤 부분, 특성을 싫어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무조건적인 편견과 혐오와는 다르다. 유행은 끝나기 마련이라지만, 유행이란 돌고 도는 법이기도 하다. 칼머리는 역사의 한 귀퉁이로 사라졌지만, 언제 또다시 등장할지 모른다. 그때, 무조건적인 배척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늘 하는 말 있지 않은가. 차이가 차별이 되지 말아야 한다.


기사입력 : 200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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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애자 07/05/17 [22:43]
레즈비언들은 양성애자에게 차별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던데 팬픽 이반에게도 그런가요?
빽구두 07/05/17 [23:43]
탁 탁 터뜨리는 글이네요.
신나요!
after 07/05/17 [23:44]
팬픽 이반은 가짜 이반이라는 편견 때문에 많이 욕을 먹은 것 같아요.
요즘은 좀 다르게 생각되는 면도 있긴 한데, 팬픽 이반 문화가 많이 줄어든 것도 있고. 가짜다 진짜다 얘기가 좀 흐릿해지는 면도 있고.
팬픽이 드러나다 보니까 아닌 경우에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팬픽 이반이 이반 중에서도 소수죠.
L내부의 다양성 안으로 수용될 수 있다면 더 다채로울 수도 있고, 열린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해요.
07/05/18 [19:58]
한국이 워낙 견디기 피곤할 정도로 남 참견이 심한 나라잖아요.
먼지 07/05/19 [17:30]
이반 커뮤니티에서 팬픽이반에 대한 비난이 많은 곳이 있는데, 10대이반들이 특히 더 그래요. 왕따문화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a 07/06/22 [05:25]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하는 의문.
저는 야오이를 볼 때는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여성에게 폭력적인 포르노를 볼 때는 느낍니다. 혹은 영상이 아니라 가공의, 만화나 소설같은 것일 경우에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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