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토해내는 여성들

연극 <특급호텔>이 조명한 ‘일본군 위안부’

이미정 2008-05-08

막이 오르면 나무로 만들어진 무대가 보인다. 네 명의 여자가 각각 좁은 한 칸의 방에 배정되어 서 있다. 그곳은 전쟁터. ‘위안부’들이 군인들을 상대해야만 했던 막사이다. 당시 군인들은 이곳을 “특급호텔”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위생공중변소”라고도. 한 여인이 입을 연다.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푸른 색 조명이 서럽다.

▲ 연극 <특급호텔>의 한 장면
남자들이 줄 지어 터벅터벅 들어오면 난 다리들 사이에서 붉게 물든다.
피처럼 빨간 내 꽃술.
하루에도 20명, 때론 더 많게 뻣뻣하게 마비된 내 다리를 들어 올린다.
적당히 할라치면 흠씬 매만 맞는다.
술 취한 놈들은 30분이 끝나도록 넣고만 있다.

또 다른 여인이 입을 연다. 아니, 그녀는 소녀다. 11살이라고 했다.

내 벽은 시계야. 전쟁이 시계의 태엽을 감지.
태양이 높이 뜨면 그림자가 길어지지.
난 벽이 길어질 때를 기다려.
10명은 빛 속에서, 20명은 어둠 속에서. 아직 12명이 더 남았어.

연극을 통해서 이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새삼스럽게 공연이 가진 현장성과 재현의 힘을 느끼게 됐다. 눈앞에서 손에 닿을 듯이 펼쳐지는 현재 형으로서의 비극 때문에 관객석의 누군가는 공연 내내 훌쩍였고, 어떤 관객들은 중간휴식이 끝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연극을 보면서 2시간 동안 관객석에 앉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둡고 무거운 내용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운 대사들이었다. ‘시적 상상력’으로 쓰인 희곡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아픔의 기억들은 여인들의 입에서 저주나 욕설로 토해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노래를 하며, 시를 말한다.

엄마가 어디 계실까.
무엇 때문인지 진찰을 받았어.
선생님께서 민들레는 성이 없댔어.
너무 아파서 민들레라도 되고 싶었어.

고통스러운 체험에서 한 여인은 민들레가 되길 꿈꾼다. 성별이 없다는 꽃을 꿈꾼다. 봄날 피어나는 화사한 노란빛의 민들레가 되길 꿈꾸며 아픔을 잊으려고 한다. 여성의 신체를 침범해 오는 폭력들에 대해서 차라리 여성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민들레라도 되고 싶다는 말로 표현된다. 표현은 절제되고, 집약된다. 극한의 고통은 아름다운 언어로 대체된다. 몸이 찢기는 고통이 민들레로 바뀌고, 방 가득히 이가 기어 다니고 벼룩이 까맣게 가슴을 물어뜯을 때 달맞이꽃과 포도넝쿨을 생각한다.

난 시들지 않고 살아남은 내 정신을 지켜야 해.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하자.
달맞이꽃, 나무들.
완두콩, 자두나무, 포도넝쿨들.
벼룩들도 다른 벼룩들에겐 아름답게 보여.

▲ 연극 <특급호텔> 포스터. 4월 30일~5월 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다.
네 명의 여인들은 오롯이 피해자로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아프고 힘겨워하면서도 웃을 줄 알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인물들이다. 잔악 무도한 폭력의 희생자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 숨쉬던 인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희곡을 쓴 사람은 라본느 뮬러(Lavonne Muller)라는 미국의 여성작가다. ‘위안부=피해자’라는 등식에 갇혀 피해자 서사만을 토해내는 기존의 연극과는 차별 점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아닌 미국이라는 다른 국적을 가진 작가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라본느 뮬러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끔찍한 국가적 폭력을 고발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녀들이 살아 숨쉬는 육체를 가진 여성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여인은 남편을 연상시키는 남자의 손길에 흥분된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고백하며 자책하고, 한 여인은 학도병으로 자원해 가미카제를 하기로 되어있는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

‘위안부’의 육체를 유린당하는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은 채, 오롯이 여성신체에 대한 폭력으로 그릴 줄을 알았다. 대신 작가의 국적으로 인한 시야의 한계로, 미국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과 자부심을 표출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연출에 의해 조정되었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원 희곡 텍스트보다 훨씬 좋은 공연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보스톤 극장의 무대에서 자국의 관객들을 향해서 ‘이런 과거의 문제가 있다.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라고 외치며 ‘위안부’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아픔을 국경을 뛰어넘어 끌어오려고 했던 작가의 노력에는 찬사를 보내게 된다.

“이 극을 통해서 ‘위안부’들이 숫자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가령, 우린 2차 대전 중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것을 알고 있죠. 그 숫자는 실제 헤아릴 수도 없는 숫자예요. 그러나 우리가 그들 중 하나와 여행을 한다면, 즉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서처럼 그런 소녀를 알게 된다면, 우린 6백만이라는 수가 의미하는 것을 깨닫게 되죠. 제가 화가 나는 것은 ‘위안부’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하나의 두려움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건 일본정부가 은폐시키고자 하는 방식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성에 관련된 치부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당사자들도 감추고 싶어하고요. 우린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진실은 알려져야 해요.” (작가의 인터뷰에서 발췌)

작가가 ‘성에 대한 치부’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 이데올로기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결합될 때 미묘한 금기가 작용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급호텔>에서는 이전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성들의 대화가 등장한다.

선희:   언젠가 한 군인이 모자를 쓴 채 내 침상에 왔을 때 그는 그렇게 거칠지 않았어. 모자를 벗은 채 들어오는 놈들은 곧장 그 짓으로 들어가지.
보배:   만일 네가 기침을 하거나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그들이 망설이기라도 하면 몇 초라도 흘려 보낼 수 있지.
옥동이: 아프다고 너무 오래 구부리고 있으면 그 놈들은 뒤쪽에서 들어올걸.
금순이: 나는 이런 식으로 언제나 할 준비는 하고 있지. 군인이 들어오면 누울 필요도 없어. 이무기처럼 피를 흘리게 하는 큰 놈이 들어온다 해도 난 누운 채 꿈쩍도 안 해.
보배:  그렇게 큰 놈들은 그것도 두 배는 크더라.
금순이: 큰소리치는 놈들이 쬐그만 뱀장어 같은 것으로 널 놀릴 수도 있어.
옥동이: 그렇지만 그 쬐그만 뱀장어가 사정을 하면 양동이를 가득 채워.
선희:  어저께는 운이 좋았어. 여섯 마리의 지렁이가 줄을 지었지. 길고 마른 것들은 그렇게 아프게 하지 않아.
금순이: 어제 난 모두 느릿느릿한 굼뱅이들 뿐이었어. 상처를 낸 딴딴한 것들뿐이었다고.
옥동이: 매일 밤 난 내 몸 구석구석이 부디 안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해.

▲  연극 <특급호텔>의 한 장면
여성적 폭력 체험을 주고받으며 그녀들은 자매애를 형성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대화는 성폭력 체험을 토해내며 상처를 극복하는 치유모임 같기도 하다. 국가를 배제하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폭력체험을 말한다. 그녀들은 식민지 조선인이기도 하지만, 남성에 의해 성 착취를 당하고 있는 여성이기도 했다. 이 연극이 주목하는 것은 후자 쪽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할 때 종종 느껴지는 ‘숭고한 희생양’으로서의 여성의 육체라는 측면이 이 연극에선 거세되어 있었다. 그래서 네 명의 여성들은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보통 여자들이 되고, 국경을 뛰어넘어 아파할 수 있는 여성 일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지점이 이 연극이 성취한 고유한 영역이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무시하고 ‘위안부’ 문제에 접근할 수 없는 한국, 일본의 작가들과는 차별화된 시선이다.

연극의 마지막에 이르면 노골적일 만큼 직접적인 작가의 메시지가 나온다. 등장인물들이 관객석을 바라보며 직접 외치는 것이다. 장면으로 형상화되지 못하고 관객을 향해 날 것 그대로 토해지는 주장이 불편하다가도, 그 구호와 외침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임이 떠올리면 십분 이해가 갔다.

상처가 망각되어 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매스컴에서도 자취를 감추었고, 대중들은 이미 많이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 세련된 포즈를 취할 수 없을 만큼 무관심이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그건 정말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서둘러 도망가는 성급한 우리의 마음은
기억이라는 환영만을 뒤에 남겨두었다.
우리의 여행은 심심한 이야기 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침묵에 잠겨 사라져 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모두 알아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역사에서
옥동이, 보배, 선희 그리고 나 금순이가
끝없이 이어지는 하루를 살았다는 것을
전 세계의 줄들이 서로 얽혀
끝나지 않는 거미줄처럼 우리를 엮어버린 그 하루들.
그때 우리의 몸뚱이는
공급되는 총검과 함께 군수품이 되었었다.

기사입력 : 200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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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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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11/08/19 [10:21]
외할머니가 갑자기 생각나요...아픈과거를 지닌채 말없이 돌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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