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없는 영화를 배급하죠”

<좋아하는 영화를 직업으로> 출간, 영화배급사 판도라 대표 나카노 리에

가시와라 토키코 2018-12-30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변영주 감독, 1995)를 보고서, 내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 또한 다나카 미츠의 책 <개정판: 생명인 여성들에게-우먼 리브론 흩뜨리기>를 읽고서, 일본에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여성해방운동 ‘우먼리브’(Women Liberation)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둘 다 나카노 리에 씨가 대표로 있는 영화배급사 ‘판도라’에서 배급, 출판한 것이다. 당시 <낮은 목소리>를 보다가 한 일본어 자막에 대해 의문이 생겨 배급사에 연락했을 때, 나카노 씨로부터 정중한 답신을 받았던 일도 기억난다. 자신이 배급한 영화 한 편 한 편에 담긴 나카노 씨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 일본군 ‘위안부’ 한국인 피해자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변영주 감독, 1995)  이 다큐를 일본에서 배급한 곳이 바로 나카노 리에 씨가 대표로 있는 영화배급사 판도라다.

 

‘판도라’는 올해로 창립 31주년을 맞아 9월부터 10월까지 도쿄의 영화관에서 특별 상영을 마쳤다. 그런데 30주년도 아니고 왜 31주년을 기념한 것일까?

 

“잊어먹었어요. 그런 걸 세어본 적이 없어서.”

 

1987년에 영화배급사 판도라를 설립해 활동해 온 나카노 리에 씨는 올해 10월 <좋아하는 영화를 직업으로>(겐다이쇼칸)라는 책을 출간했다. “일도 영화, 취미도 영화”라고 말하는 나카노 씨의 인생, 멋진 영화와 감독들과의 만남, 영화를 배급하기까지의 여정과 비하인드 스토리가 가득한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라 할 만한 책이다.

 

기업에서 엄청난 성차별 겪고 퇴사…좋아하는 일을 하자!

 

나카노 씨는 어릴 적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절에서 자랐다. “엄청난 시골”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는 신사(神社)에 있는 마츠리나 학교 영화교실에서 본 영화들뿐이었다. <십계>(세실 B. 데밀 감독, 미국, 1956)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빅터 플레밍 감독, 미국, 1939) 같은 영화를 보며 가슴이 뛰었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니아짱>(1959)은 지금도 인상 깊이 남아 있다.

 

▶ 1987년에 설립해 올해 31주년을 맞은 영화배급사 <판도라>의 대표 나카노 리에(1950년 시즈오카현 출생) ⓒ사진: 우이 마키코

 

어릴 적 꿈은 법률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신문기자가 되는 것이었다고. 그런데 도쿄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당시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라 수업은 취소되기 일쑤였고 나카노 씨는 남는 시간을 영화에 빠져 보냈다.

 

“당시엔 시네마테크가 많았으니까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일본의 밤과 안개>(1960),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육탄>(1968)… 정말 좋았죠.”

 

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사들에선 채용 계획이 없어서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여성에게 맡겨지는 업무는 남성을 보좌만 하는 것이었고, 남성에 비해 낮은 임금 등 엄청난 성차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하다 몸도 망가져 약 2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화 일을 하자”고 결심, 지인의 소개로 프랑스 영화사에 취직해 13년간 근무하며 영화 배급일을 배웠다.

 

건설회사를 그만둔 후, 도쿄 신주쿠를 걷다가 다나카 미츠(1943년생, 1970년에 베트남전 반대 집회에서  ⌜변소로부터의 해방⌟  선언문을 뿌린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우먼리브 운동의 시초가 됨)의 책 <생명인 여성들에게>를 만나게 된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글 한 줄 한 줄 ‘그래, 이거야! 그래, 맞아’ 하고 끄덕였다.”

 

나카노 씨는 “나와 같은 말을 하는 여성들과 만나는 기쁨” 때문에 일을 겸하여 ‘여성들의 영화제’를 열었다. 사회에 만연한 강간을 고발하는 영화 <소리 없는 비명>(A Scream from Silence, Anne Claire Poirier 감독, 캐나다, 1979)을 상영했으며, 여성들을 위한 정보서 <도쿄 여성 도움집>과 여성수첩도 제작했다.

 

▶ 사회에 만연한 강간을 고발한 영화 <소리 없는 비명>(Anne Claire Poirier 감독, 캐나다, 1979) 중 한 장면.

 

<하비 밀크의 시간들> <낮은 목소리> 역사적인 영화들

 

그러던 중, 1986년에 체류하고 있던 뉴욕에서 한 편의 영화와 만난다. <하비 밀크의 시간들>(The Times Of Harvey Milk, 롭 엡스타인 감독, 1984)이었다. 197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자임을 공언한 후, 최초의 게이 시의원(1977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의원)이 되어 소수자 차별 철폐에 전력을 다하다 훗날 암살당한 정치가 하비 밀크의 행적을 좇은 다큐멘터리다.

 

영어 대사를 못 알아들었지만, 화면을 통해 그 내용이 생생히 전해지는 하비 밀크의 모습과,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의 생동하는 모습들을 보고서 이 영화를 일본에서 상영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 배급권 취득 협상, 개봉 극장 결정, 자막 작업, 성소수자에 대해 이해도가 떨어지는 언론 대상 홍보 등 많은 난관을 거쳤는데, 그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일은 ‘coming out’을 일본어로 어떻게 번역할까를 정하는 것이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영어 단어를 일본어로 읽는 ‘커밍아웃’이라고 번역했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컴 아웃’이나 ‘커밍아웃’은 일상용어로 정착했다. 바로 이러한 역사를 만든 이 작품은 ‘판도라’라는 회사 이름을 단 첫 배급 작품이 되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상영되고 있다.

 

▶ 미국 최초의 동성애자 시의원으로 당선되었고 훗날 암살당한 하비 밀크의 정치적 행보를 좇은 다큐멘터리 <하비 밀크의 시간들>(The Times Of Harvey Milk, 롭 엡스타인 감독, 1984) 이 영화가 판도라의 첫 배급 작품이다.

 

나카노 리에 씨는 우익단체 등의 방해로 몇 년이나 상영을 위해 싸워야만 했던 <낮은 목소리>와 속편(1996년 2편, 1999년 3편), 그리고 각국 여성감독의 작품들을 일본 사회에 소개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 상영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실현했다.

 

영화배급사 판도라는 한국과 러시아의 영화 정보를 소개하는 책들도 출판하고 있다. 영화 역사 초창기의 여성감독 알리스 기 블라쉐(Alice Guy Blache, 1873~1968, 프랑스)의 자서전이 대표적이다.

 

또 알렉산더 소크로프 등 지금은 거장으로 알려진 러시아 영화감독의 작품들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배급하기도 했다. “영화를 고를 때는 소리와 영상을 기준으로 골라요. 소크로프의 작품은 왜곡되고 시커먼 화면이 롱 컷으로 이어지는데, 빛의 촬영법과 소리 녹음법 등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근사하죠.”

 

최신 배급 작품은 러시아 카렌 샤크나자로프 감독의 <안나 카레리나: 브론스키 백작의 사랑>(Anna Karenina. Vronsky’s Story, 2017)이다. 선택의 포인트는 “장대한 스케일”.

 

“배급의 정책을 굳이 말한다면, (영화 속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살아갈 것, 차별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나카노 씨. “알렉산더 소크로프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 베르너 헤어조크도 영화에서 차별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차별을 느끼게 하는 영화는 정말 불쾌한데, 일본 남성 감독 작품에서는 많이 느껴지죠.”

 

▶ 청각장애 소녀가 주인공인 스웨덴 단편 영화 <사일런트 차일드>(A Silent Child, 예스퍼 클레베너스 감독, 2010)

 

12월엔 청각장애 소녀가 주인공인 단편 영화 <사일런트 차일드>(A Silent Child, 예스퍼 클레베너스, 스웨덴, 2010) DVD를 발매하였고, 2019년에는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 1921~2012) 특별상영전도 개최할 예정이다.

 

커뮤니티 상영회 ‘함께 영화 보는 경험’은 소중해

 

지금, 영화계는 큰 변환기를 맞고 있다. 디지털기술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으로 극영화를 제작하는 등 소수·저예산으로도 영화를 제작하거나 배급하는 일이 가능하다. 영화를 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스마트폰 등으로 보거나, 레스토랑 같은 곳에 소수가 모여 토크를 곁들이는 상영회도 인기다.

 

이런 환경 변화에 맞춰 앞으로 나카노 리에 씨의 계획은 어떻게 될까?

 

“소수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티 상영회에 주제 의식이 강한 단편영화들을 소개하고 싶어요. 마니아층을 위한 영화 배급도 하고 있거든요”라고 말하며 빙긋 웃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목표가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영화교실을 부활시키고 싶어요. 도시생활에서 친밀함이란 것을 느낄 수 없게 된 지금 시대에 다 함께 영화를 보는 경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경험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기사입력 : 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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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1 [07:09]
초등학교 때 같이 본 영화는 분위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어요. 같이 보고 웃고 한 기억.. 요즘에는 더 필요하다는 얘기에 공감이 갑니다 
D 18/12/31 [00:46]
차별이라는 요소를 아예 느낄 수 없는 영화들이라니.. 언급된 영화들 전부 보고싶어지네요. 일본처럼 가부장제가 강력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행동하고 있다는게 정말 멋집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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