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남성)들이 눕힌 비너스를 깨워 일으키자

여성주의 현대미술 전시 『깨어나요, 비너스!』를 기획하며

이충열 2019-05-20

[편집자 주] 클럽 버닝썬 사태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상업적으로 이용당하고 성폭력을 당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강간문화”를 비판하고 성적 대상화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이러한 고민을 안고 여성의 주체적 재현/표현을 주제로 작업을 시도하는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이충열 씨의 글을 싣습니다.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선언

 

안녕하세요,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이충열입니다. ‘여성주의 현대미술가’라는 명칭이 생소하게 느껴지실 텐데요. 기존의 사회시스템에서 사용되어 온 언어는 보수적이라서 소수자들은 때로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없어서 새로 언어를 만듭니다. 저 역시 기존의 분과 학문이나 분야 구분으로는 제 예술 활동을 설명하기 어려워서 ‘여성주의 현대미술가’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성주의 현대미술 선언>(렉처 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로 기록, 19분 58초, 2018)을 기획하게 된 배경은 작년 6월 지방선거 기간에 일어난 사건 때문입니다. 당시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 씨의 포스터를 보고, 한 중년남성 ‘인권 변호사’가 “개시건방진”이라며 SNS를 통해 분노를 표한 바 있지요. 곳곳에서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와 현수막이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21세기에, 정치인이 되겠다고 나선 비(非)청소년 여성의 당당한 이미지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기대하는 방긋방긋 웃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을 당하는 상황이 충격이었습니다.

 

▲ 2018년 6월 4일 한 중년남성 ‘인권 변호사’의 페이스북 캡쳐(좌), 이충열 『개시건방진』 포스터에 콜라주, 비닐_59×42cm×3, 가변설치, 2018(우)  

 

이런 상황에서, 저는 그동안 공부하고 고민했던 여성주의 현대미술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다짐을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구성했습니다. 여성혐오에 맞서고, 그 기반이 되는 남성중심 사회의 권위주의에 맞서서 예술가로서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선언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여성주의 현대미술은 

획일적인 아름다움의 기준과 개인을 억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 과거에 만들어진 기준과 규범을 재고하고, 각자 자신을 존중하는 경험을 통해 타자와 공존할 수 있게 돕는다.

 

완성하여 마침표를 찍기보다 펼쳐두고, 열어놓고, 관찰한다. 있는 그대로의 장점에 집중하며 길들여지기 이전을 상상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를 되돌아보고 가능성을 찾아낸다.

 

예술은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고,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대사회에 필요한 예술은 자기가 선 곳에서 보게,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자유로운 표현을 하게 돕는 것이다.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판단의 권한과 예술할 자유를 되찾아 일상을 예술로 채우자!>

 

‘정상성’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현하던 미술과는 결별

 

현대미술가로서 저의 초기작들은 ‘정상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2009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관한 드로잉 연작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일대일 종속적인 이성 간의 연애만을 ‘정상’이라고 하고 ‘결혼’을 연애의 목표로 삼으며 자녀를 출산하여 ‘정상가족’을 이루는 것을 모두가 당연히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하는 것이 실상은 얼마나 ‘인공적이지’ 드러내기 위해 제도지에 설계도를 그리듯 표현했습니다.

 

▲ 드로잉 연작 『결혼-식 5단계』 중에서 3단계, 이충열, 2009  


드로잉은 이성애 연애 관계의 의례적인 데이트 코스와 방법(해돋이, 발렌타인데이)과 형식화된 결혼-식(결혼-식 5단계), ‘정상가족’의 화목한 모습(가족 공원, 꽃놀이, 가족여행)을 그렸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같은 것을 욕망하도록 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이 필연적이며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트’에서 뒤엉켜 추락하는 가족의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후 미술 실기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다양한 예술적 자극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림이나 조각처럼 전통적인 ‘예술’ 장르는 근대 이후에 ‘교육’이라고 분류한 영역의 역할을 해왔어요. 기독교 신앙 중심의 세계관이 장악했던 중세 유럽에선 ‘예술’이 성경의 이야기를 재현하여 신앙심을 고취하였고, 절대왕정이 발달했던 근대에는 왕과 귀족 등의 ‘이상’을 재현해 사람들에게 ‘기준’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그림과 조각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고 전파했다면, 현대의 예술은 이를 통찰하고 비판적으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돕고자 합니다. 현대미술가인 저는 더이상 근대 기준의 보수적인 제도와 분류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2013년에는 <미술적으로 놀기>라는 작업을 했습니다. 미술관을 통하지 않고 작가가 직접 관객을 모으고, 작가가 작업 방식을 제안하면 관객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왜 그런 건지 계속 소통하는 방식이었죠. 개인을 소외시키는 현대 물질문명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분리하여 그 사이에 위계를 정하는 것과, 미술 제도의 권위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저는 집으로 관객을 초대했습니다. 또, 자본력을 가진 사람이 돈을 주고 작품을 구매하는 것과 다르게, 작가와 관객이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것으로 관계를 설정하면서 ‘화폐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였습니다.

 

▲ 관객을 작가의 집으로 초대한 『미술적으로 놀기』 2기 링가링가 놀이, 이충열, 2013  

 

‘외모지상교’ 믿는 사회를 풍자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왜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할까? 제가 고민해 온 주제인데요. 그러다 보니 대중매체가 조장하는 욕망이 무엇인가 관찰하게 되었고, 여성을 억압하는 많은 이데올로기 중에서 ‘외모지상주의’에 주목하게 되었죠, 여성의 가치를 외모로 평가하는 것이 여성의 자존감에 미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고민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주제가 아닐까 망설여지기도 했죠. 그러다가 한국여성민우회 ‘바디 프로젝트’라는 모임을 만나면서 다른 여성들의 몸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과 고민을 들으며 확신을 얻었어요. 우리는 여성의 몸을 다룬 책을 읽고 타고난 몸, 변화하는 몸, 몸과 자유 등의 주제에 대해 논의했죠. 저는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가 진행한 프로젝트 ‘성형산업 스파이단’에 초대되어 함께 공부하면서, 미(美)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적극적인 국가 정책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2015년 10월 27일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열린 ‘성형산업 스파이’ 활동발표 & 몸다양성 워크숍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행사에서 전시를 기획했어요. 관객들이 세 부분으로 나뉜 통로를 통과해야 하는 “마귀들과 싸울지라”(성형광고, 잡지, 외모지적질 텍스트 등 가변설치) 작업을 했죠. ‘외모지상교’ 입장에서 ‘마귀’의 꾐에 빠져서 ‘외모 다양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을 지지할지, ‘아름답고 올바른 외모’(아외님)을 섬길지 고민하게 만드는 설정이었습니다.

 

또, 서로 다른 외모의 여성들이 성형외과 상담에서 들은 말들을 편집해 만든 <이 몸의 소망 무엔가>(사운드, 4분 8초)를 통해서, 여성들에게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 2016년 민우회가 주최한 <얼굴로 일하는 거, 아니잖수?> 행사 중에서 『재직 감사 예배』(이충열 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 기록, 18분, 2016) 

 

2016년에는 민우회에서 ‘외모 피로사회’에 대응하는 <피로회복스파이-Code Name: 용모난잡>을 진행했는데, 저도 기획단으로 활동했습니다. 기업 구인란의 ‘용모단정’이라는 말 안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조건들을 조사하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여성의 외모가 능력으로 둔갑하는 수많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알게 되었지요.

 

그해 11월 7일 창비학당 50주년홀에서 열린 민우회 주최 행사 <얼굴로 일하는 거, 아니잖수?>에서 저는 ‘아외님’(아름답고 올바른 외모)을 섬겨서 취업에 성공함을 감사드리는 <재직 감사 예배>(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 기록, 18분, 2016) 작업을 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기도문과 찬송가를 패러디하여 예배 형식을 취하며, 중간에 미용체조를 하기도 하고, ‘아멘’ 대신 ‘미모’로 화답하게 했죠.

 

‘외모지상교’ 역사를 담은 ‘예인교회’(연예인의 외모를 닮기 위한 사람들의 교회) 주보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외님과 연예인의 이름으로 다이어트 약을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바디복음 28:18-20) 등의 말씀을 넣었습니다.

 

주제의식을 이어가서 2017년 페미니즘 카페 두잉에서 연 개인전 <오직 아름다울 것>에서는 설치와 영상, 관객참여 워크숍 작업을 했는데요. 전시장 입구의 계단에 설치된 작업 <늘 언제나 늘 가까이>(현수막 천에 글자 프린트, 가변설치, 2015-17)는 관객이 앞을 가로막는 천을 뚫고 계속 지나서 계단 끝까지 내려오면 전신거울이 설치되어 있어 ‘날씬한 몸’의 실루엣 바깥 부분은 파편화되어 보이게 했습니다.

 

이동을 막았던 천에 쓰인 말들-“옷이 그게 뭐냐? 꼭 남자애같이!” “너도 가슴만 크면 괜찮을 텐데”, “살찐 여자 좋아하는 남자가 어딨냐?” “여자가 너무 말라도 보기 흉해”-등은 청년 여성들이 직접 들었던 외모 지적을 수집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시선의 대상/이미지로서 규정되고 평가받는 사람이 어떤 심정일지 모두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 2017년 페미니즘 카페 두잉 이충열 개인전 <오직 아름다울 것> 중 『맞추어 보기』(거울, 170-62-5cm) 

 

관객/여성을 소외시키는 전시 비판한 페미니즘 미술의 매력

 

이 전시 행사에서는 ‘페미니즘 미술’ 강의도 네 번에 걸쳐 진행했는데요, 너무나도 멋진 페미니즘 미술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죠. 저는 페미니즘 미술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맥락을 함께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페미니즘 미술도 미술사의 수많은 ‘장르’ 중 하나, 또는 ‘과거에 유행한 사조’라고 오해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강의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들이 얼마나 여성혐오적인지 분석하고, 왜 그런 시각문화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는지 서양 미술사의 ‘보는 방식’을 추적해 들어갔습니다. 또,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퍼포먼스나 설치 등이 박제되거나 ‘신화화’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미술의 경향에 대해서도 소개했죠. 미술사의 흐름에서 페미니즘 미술의 등장은 필연적이었고, 페미니즘 미술도 변화해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페미니즘 미술에 대해 몇 가지만 소개해드릴게요. 콧수염과 턱수염이 빽빽하고 키가 큰 남성과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이 나란히 있습니다. 남성이 자신의 수염을 뽑아서 여성에게 줍니다. 여성은 남성에게서 받은 수염을 자신의 턱에 붙입니다.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주는 ‘남성다움’의 상징인 턱수염을 여성/작가의 얼굴로 옮긴 이 작업은 아니 멘디에타(Ana Mendieta, 1948~1985)가 1972년에 친구와 함께 한 작업입니다. 퍼포먼스가 상징하는 바도 의미심장하지만, 저는 작업에 참여한 남자 친구가 턱수염을 모두 뽑는 고통을 감내할 만큼 이 작업의 취지에 공감했다는 점, 아나 멘디에타가 친구를 설득했을 과정을 상상하면 이 작업이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1985년에 조직된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라는 여성예술가 그룹은 통계를 이용하여 성차별 현실을 고발하며 현재까지도 작업을 진행하고 있죠. 초기에는 미술계 내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고발했고, 점차 다른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불평등까지 관심의 범위를 넓혀갔어요. 게릴라 걸스는 익명으로 활동하며 공식적인 자리에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등장합니다. 여성이 사회적 발언을 하면 그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개인의 외모 평가나 신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 목소리를 왜곡하곤 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게릴라 걸스의 작업은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인’ 통계수치를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전달하며 효과적으로 시각화합니다.

 

▲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의 <여성 예술가가 되면 좋은 점>(1988)  ⓒGuerrilla Girls

 

1970년대 페미니즘 미술운동 이후 서양의 현대미술은 다양한 이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분류하지 않아도 여성 작가의 작업이라면 자연스레 여성주의 관점이 들어가 있는 걸 보게 되지요. 그만큼 페미니즘이 상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예로 제닌 안토니(Janine Antoni, 1964~)를 들 수 있어요. <애정어린 보살핌>(Loving Care, 퍼포먼스, 안토니 도페이 갤러리, 1993)에서 제닌 안토니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검은색 염색 물감에 적십니다. 그리곤 작은 전시실 한쪽 구석에서부터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머리카락을 붓 삼아 바닥을 칠합니다. 작가의 뒤에서 퍼포먼스를 보던 관객들은 바닥이 검게 채워지면서 점점 설 곳을 잃고, 결국은 전시실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 퍼포먼스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액션 페인팅을 비판적으로 연상시킵니다. 거대한 캔버스 천에 과시적으로 물감을 흩뿌리던 그 작업은 ‘미술’의 ‘중심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죠. 작가 자신은 ‘액션’으로 스타가 되었으며, 미술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려 개인들의 재산을 불리는 데에도 기여했어요.

 

또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이 1960년에 한 <청색시대의 인간측정학>이라는 작업도 떠오릅니다. 이브 클랭이 턱시도 차림으로 나와서 나체의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청색 물감을 발라 온몸으로 드로잉하도록 ‘지휘’하는 퍼포먼스죠. 이전부터 이브 클랭은 ‘울트라 마린’이라는 파랑색에 특허를 내서 자신의 고유 영역과 독창성을 주장해왔어요. 하지만 미얼 래더맨 유퀄리스(Mierle Laderman Ukeles, 1939~)는 미술관을 직접 쓸고 닦으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전담되고, 평가 절하되고, 숨겨진 ‘유지 관리’ 노동을 가시화하였습니다. 또한 ‘미술관’이라는 제도의 ‘주인공’ 위치에 있던 작가의 위치를 ‘청소부’ 위치로 끌어내렸죠.

 

제닌 안토니 역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붓 삼아 바닥에 흔적을 납깁니다. 가사노동을 떠올리게 하는 이 행위는 공간을 채우고 ‘미술’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비웁니다. 고요하지만 강력하며, 관객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해석할 수 있게 하지요. 남성 작가들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능력이나 독창성을 주장하고 과시하려는 것과 달리, 여성주의 감수성을 가진 여성 작가들은 가부장제가 정한 위계를 공격하고 기존의 관념들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버닝썬 사태, 클럽이라는 공간은 여성에게 무엇인가

 

▲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우리가 ‘여신’ 칭송을 멈춰야 하는 이유, 이충열, 한뼘책방, 2019) 

페미니즘 미술을 소개한 강의 내용 중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평가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정리해서 올해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한뼘책방, 2019)를 펴냈습니다. 남성 저자의 서술에 공감할 수 없던 제 사춘기 경험으로 시작해서 독자들이 ‘명화’를 어떻게 보는지 진단하고,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같은 경험도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재현된 사례와 남성이 재현한 여성, 여성이 재현한 여성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고 남성 중심의 언어와 시선만이 지배했던 사회에서, 가부장제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규정했는지 ‘누드’ 그림을 통해 분석해보았죠.

 

그러면서 저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그림/사진을 감별해보는 ‘충열 테스트’를 제안했습니다. 또,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는 ‘네이키드’라는 개념도 제시했어요.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가 출간된 3.8 세계여성의 날, 저는 여성들의 몸을 착취하여 운영된 클럽 버닝썬 앞 인도에서 춤을 추면서 강간문화에 저항하는 행사 “버닝워닝”(Burning, Warning)에 함께했습니다. 아직도 ‘여성’이 인간/주체가 될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면서, 이 문제를 작업으로 다뤄보리라 결심했죠.

 

1990년대 중후반, 처음으로 클럽에 갔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클럽으로 내려가던 계단에서부터 거대한 음악 소리가 쿵! 쿵! 하고 심장을 때리는데, 숨이 막힐 것 같으면서도 마구 설렜어요. 화려한 조명 아래 서니 주인공이 된 느낌이 들면서도, 빛이 공평하게 비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아 자유로웠어요. 아주 오랜만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아이처럼, 혹은 ‘남자’처럼 자유롭게 움직였어요. 힘껏 여기저기로 손과 발을 휘젓고 뻗으면 ‘여학생’으로서 ‘신체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음악에 몸을 내맡기면서 일상에서 의식하지 못했던 내 몸의 존재와 그 물질성을 낱낱이 느낄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당시 클럽에서는 다양한 연령대와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여성들의 자유로운 모습은 구경거리가 되어갔습니다. 클럽에는 춤추는 여성들을 ‘보러 온’ 남성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죠. 남자들은 여성들의 춤을 ‘이성을 유혹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성들이 무례하게 춤을 방해해서, 자유롭다는 느낌은 점점 줄어들었죠. 이윽고 남성이 호감 가는 여성에게 술을 사면서 ‘헌팅’하는 것이 ‘클럽 문화’인 것처럼 되어갔습니다. 클럽은 더이상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게 된 것이지요.

 

사냥감을 찾는 듯한 ‘시선’들이 내 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느껴졌습니다. 사실 여성들이 클럽에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아온 성적 욕망을 표현하고 싶을 수 있죠. 성적 주체로서 자신의 매력을 표현하고 싶어서 클럽에 갔을 때, 타인의 시선을 즐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치 않는 접촉이나 위해를 가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입장료 외에 술 판매수익이 늘어나서인지 클럽이 엄청나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하의 작은 공간에 있던 허름한 클럽이 규모를 키우고 화려하게 꾸미면서 입장료를 높여 받는 곳, 연령 제한을 두는 곳, 저녁 9시 이전 입장은 무료인 곳, ‘여성은 무료’로 입장시키는 곳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클럽들은 여러 방법으로 ‘젊은 여성’을 유치함으로써 매출을 늘려갔어요. 클럽 간 경쟁이 심해지자 여성을 ‘미끼’ 삼아 남성들의 소비를 더욱 부추겼죠. 그러면서 ‘돈을 냈으니,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도 된다’는 폭력적인 생각이 ‘정당화’되는 공간이 된 것이지요.

 

춤을 추는 것은 좋은데, 커다란 음악과 화려한 조명 아래 여럿이 춤을 추면 더 재미있는데, 클럽은 어느덧 불편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가끔 클럽 가는 것을 도전(?)해보았지만 실망만 하고 올 때가 많았고, 마지막으로 갔던 작년 가을에도 여기저기 찝쩍대는 남성 두 명 때문에 저도, 친구들도 너무 불쾌해져서 금세 나와버렸습니다.

 

▲ 『여성주의 현대미술 선언』(이충열, 렉쳐 퍼포먼스 단채널 비디오 기록, 20분, 스틸컷 모음, 2018) 

 

평가당하고 선택당하는 대상을 넘어 ‘내 몸 감각하기’

 

올해 ‘버닝썬 사태’를 접하고서는 충격에 휩싸였고, 시선과 몸에 대한 저의 고민은 더 깊어졌습니다. 여성이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여성으로서 억압받아온 몸짓’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성별 고정관념과 남성 중심의 사회가 금세 변하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변화를 이끌기 위해 여성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몸의 경험’은 가능하지 않을까? 여성주의 현대미술가로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죠.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주체로서 여성의 몸’에 대한 상상 또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지 않을까? 이론적이고 관념적이고 당위적이기보다는 경험적이고 실제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몸에 대한 접근 방법은 무엇일까? 이렇게 고민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에 의해 ‘구경거리가 되고, 평가되고, 선택당하는 대상’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감각할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렇게 하여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에 대응하는 제목으로, [깨어나요, 비너스!]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저는 여성/작가로서 과거의 미술에서 여성이 재현된 방식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여성/작가는 대상이자 주체라는 이중의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이죠.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재현된 여성의 이미지가 여성과 남성에게 미친 영향, 그리고 억압된 여성의 몸에 대해 고민하면서 지난해부터 [툿 네트워크] 참여하게 되었어요.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몸/움직임에 대한 작업을 하는 분들이 주축이 된 [툿 네트워크]는 2013년부터 자생한 몸 탐구모임입니다. ‘툿’이라는 의태어를 차용해 씨앗을 뱉어내는 행위처럼 우리들의 창작행위도 발아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고 해요. 미술의 오랜 역사에서 시선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몸’을 다르게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와 많은 배움을 얻고 있죠. 이번 전시에서 [툿 네크워크] 멤버 두 분과 협업을 합니다.

 

남성/주체에 의해 재현된 여성/대상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에게서 분리하여 바라보게 되고 타자화하기 쉽습니다. 사실 지나친 경쟁 구도 속에서 남성 역시도 소외의 경험을 하고 있고, 타인에 대한 폭력에 무감각해지기 쉽죠. 이러한 현실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대안을 모색하면서 관객이 자신의 몸을 주체로서 감각하고, 경험하고, 소통하는 장을 마련하였습니다. [깨어나요, 비너스!]는 ‘구경’하는 전시가 아니라 ‘경험’하는 전시라서 관객의 참여로 완성됩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와주실 관객을 기다립니다.

 

*전시명: 깨어나요, 비너스!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이충열 기획개인전)

*전시 기간: 2019년 5월 23일(목) ~5월 30일(목) (월요일 휴무)

*전시 장소: 무국적 아트스페이스

 

5월 23일(목) 오후 7시- 오프닝 퍼포먼스

5월 30일(목) 오후 7시- 몸과 시선에 대한 집담회

5월 24일(금) 오후 2시- 워크숍 감각드로잉 1(이충열)

5월 25일(토) 오후 2시- 워크숍 감각드로잉 2(이충열), 

        오후 5시- 워크숍 감각하는 몸 1(안무가 이선아)

5월 26일(일) 오후 2시- 워크숍 감각드로잉 3(이충열), 

        오후 5시- 워크숍 감각하는 몸 2(안무가 서경선)

(워크숍은 각 1시간 정도 소요되며, 관객이 창작을 지원하는 개념으로 참가비가 있습니다.)

 

*안내 및 신청: https://bit.ly/2W1pFgT

기사입력 : 2019-05-20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Share on Google+ 밴드 naver URL복사
뒤로가기 홈으로
디즈니 19/05/20 [15:07]
멋지네.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했던 거 다시 생각하게 됐다.
콩지니 19/05/20 [19:27]
현대미술 좋아하긴 했는데, 늘 아쉬웠던 부분이었어요. 너무 반갑고 기획하신 분 멋지십니다!
ㅇㅇ 19/05/21 [21:22]
짱멋지다
the 19/05/23 [16:49]
재밌게 읽었어요 

가장 많이 읽은 기사

URL 복사
x

PC버전

Copyright ⓒ ildaro.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