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하면서도 고급스럽게’ 웹디자이너의 적정 노동값은?

<기록되어야 할 노동> 20년 경력 웹디자이너 하루 씨의 이야기

은혜 2019-10-13

※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일’을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싣습니다. “기록되어야 할 노동”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편집자 주

 

유망직종 웹서비스 분야, 노동자의 ‘열정’에 기댄 성장

 

하루 씨(40세, 가명)는 웹디자이너에 대해 ‘웹상에 보여지는 모든 정보들을 디자인하는 이들’이라고 정의한다. 웹상에 사이트를 구축해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개설하고, 이곳에 각각의 정보들을 알맞게 배치하고, 때론 뉴스레터나 웹자보를 만든다. 뿐만 아니다. 온라인쇼핑몰의 상품 설명에서부터 각종 모바일 쿠폰,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배너광고까지 망라한다. 나아가 일선 노동 현장에서는 이러한 웹디자인을 한 김에 명함, 리플렛, 카달로그 등 출판 인쇄물까지도 감당한다고 한다.

 

▲ 웹디자이너 하루 씨(40세)는 경력 20년 차 베테랑이다.    ©은혜

 

올해 5월경 온라인쇼핑이나 모바일쇼핑의 비중이 갈수록 증가세에 있다는 통계청의 동향 발표가 있었다. 무려 11조 원이 훌쩍 넘는 성장세라 했다. 한편으로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2016년 기준 91%로,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기종은 또 얼마나 다양하고 빠르게 변화하는가. 개별 모바일 환경에 맞춘 맞춤형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터다. 그만큼 웹디자인의 수요 또한 갈수록 많아질 거라는 기대도 쉽사리 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IT산업이 눈부신 성장을 이룬 만큼 웹디자이너들의 지위나 대우도 올라갔을까? 경력 20년 차, 웹디자이너 1세대인 하루 씨의 전망은 의외로 암울했다. 이는 그녀가 웹디자이너로서 겪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스물한 살, 대학교 4학년 때 첫 취업을 했죠. 그때가 정확히 2000년도에요. 지금까지 네 번 이직했어요. 이직하는 사이 잠깐잠깐 빼고는 이 일만 계속한 셈이죠. 지금까지 받아왔던 월급은 2백만 원을 넘어본 적이 없어요. 늘 고만고만했죠. 요즘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 이젠 한 달에 딱 백만 원 정도만 고정적으로 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웃음)”

 

하루 씨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웹디자이너로서 그녀가 걸어온 이력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돌아보면 제대로 갖춰져 있는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었네요. 규모가 큰 회사에서는 그들만의 규율이 있잖아요. 연차가 며칠이고, 호봉이 올라가고, 인센티브도 있고. 내가 다녀온 회사들은 그런 게 다 없었던 거죠. 처음에는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업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어 간다’라는 의식이 강했던 사람들이 있는 업체들을 다녔던 거고. 그러나 뒤집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직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일궈온 거잖아요. 그리고 그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여긴 원래 이런 식이야, 이렇게 해야 돼. 그럼 ‘여긴 원래 이런 건가?’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게 되는 암묵적 강요가 늘 있었죠.”

 

▲ 연도별 소트프웨어 산업 생산액과 총 종사자 수. 노동자 수는 줄었는데 생산량은 늘었다. 한 명의 노동자가 감당했던 생산량이 가중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출처: IT노동자 근로실태조사 및 법·제도 개선방안, 국회사무처, 2013

 

수당 없는 야근, “너무 힘들어서” 퇴사 후 입사 반복

 

한국의 IT산업은 1980년대 메모리, 반도체 등 하드웨어 중심의 제조업 분야가 먼저 규모화됐다. 이를 기반으로 1990년대 들어서는 인터넷망이 보편화 됐고, 정보통신 관련 산업이 급부상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개발과 서비스 사업 쪽으로 성장세가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2000년대 초반은 IT서비스 분야의 벤처기업 붐이 크게 일었던 시기로 기록된다.

 

이때 웹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웹마스터, 검색전문가, 인터넷방송 기획자 등등 웹 관련 분야가 유망직종으로 부상했다. 하루 씨도 딱 이 시기에 직업으로서 웹디자이너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스물한 살이었어요. 전주에서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모집 공고가 붙어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재밌을 것 같아서 이력서를 무턱대고 냈더니 된 거예요. 그런데 서울에 딱히 연고가 없었어요. 할머니 집이 일산이었는데 그곳에서 서울 강남에 있는 회사까지 출퇴근했어요. 출퇴근 시간만 해도 왕복 3시간이 걸렸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수습 월급이 80만 원이었는데 초반 몇 개월 일하고 바로 정직원이 됐거든요. 정직원이 돼서는 월급이 백만 원으로 올랐어요.”

 

하루 씨의 첫 직장이었던 A 회사는 웹프로그래머와 웹디자이너 합쳐서 열 명 안팎의 규모였다. 웹프로그래머는 남성, 웹디자이너는 여성으로 성별 분업화가 꽤 뚜렷했는데, 6대 4 정도로 프로그래머의 구성 비율이 좀 더 높았다.

 

“그때 웹 쪽 일은 야근이 많았어요. 그리고 야근 수당이 있지도 않았어요. 새벽까지 일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저는 왕복 출퇴근 시간이 3시간이었잖아요. 그래서 너무 늦으면 아예 새벽에 퇴근하고 늦은 오후에 출근하는 게 더 나은 거였어요. 제가 다녔던 곳은 개발 분야를 더 특화시킨 회사였기 때문에 프로그래머들이 원하는 것을 맞춰줘야 했어요. 프로그래머들이 프로그래밍을 하면, 우리는 그 소스에 맞춰서 예쁘게 꾸며줘야 하는 후반 작업을 했던 거죠. 프로그래머들의 작업 속도에 따라서 우리의 작업 시간도 달라졌어요. 그런데 이게 야근 수당도 없고, 뭣도 없고. 이런 패턴이 그냥 당연한 것들이었어요. 그게 그 시대 웹 쪽의 문화였어요. 이게 잘못됐다는 의식조차 없었죠.”

 

하루 씨는 그렇게 야근을 일상으로 받아 안았다. 그리고 그 회사를 2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뒀다. 퇴사 이유는 ‘너무 힘들어서’였다. 그녀는 조금 쉬고 B 회사에 다시 취직했다. 이번에는 웹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웹에이전시였다. 직원 수가 여섯 명으로 모두 여성이었다. 이곳에서도 야근은 일상이었지만, 일하기는 훨씬 편했다. 직원 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이전 직장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밀려왔을 때 ‘할 수 없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결국 떠안게 되더라도.

 

그곳에서 5년 정도 일했다. 그때 하루 씨가 받았던 월급이 120만 원에서 150만 원 사이. 그 돈으로 서울의 셋방을 얻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20대 초중반의 나이여서 부모님도, 본인도, 젊은 여자 혼자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고 한다.

 

일산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6~7년 정도 하다 보니 체력이 바닥났다. 쉼이 절실히 필요했고, 휴직은 생각조차 못 하니 퇴사를 선택하게 됐다.

 

서울에서 다닌 두 회사 모두 정규직으로 일했지만, 하루 씨는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아니, 퇴직금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쪽 업계는 늘 벤처회사였고, 따라서 늘 어려웠으며, 노동에 대한 값을 챙겨줘야 한다는 걱정보다 노동자의 열정에 기대어 성장하길 바랐다.

 

▲ 한 온라인교육업체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했던 여성이 주 3일 야근, 오전 10시 출근해 새벽 3~4시까지 일하는 일상을 견디다 2018년 4월 자살했다. ‘푹 자고 싶어’, 죽기 전 언니에게 보낸 메시지 중 하나였다 한다.  ©IT노조 itunion.or.kr

 

서울의 벤처기업을 나와서 지역의 영세업체를 차렸는데…

 

서울에서 다닌 회사도 그렇게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었는데, 전주에서는 더 작은 회사에 다니게 됐다. C 회사는 하루 씨까지 합쳐 다섯 명이 구성원인 업체였다. 하루 씨는 1년 반 정도 그곳에 다니다가 퇴사했다. 이번에는 조직 내 권력 관계로부터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하나의 홈페이지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웹프로그래머와 웹디자이너 간의 협업이 긴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만큼 두 사람 간의 소통이 중요한데, 하루 씨가 협업해야 했던 상대 웹프로그래머는 매우 독단적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웹프로그래머가 상사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 씨의 의견은 늘 묵살되고 무시됐다.

 

하루 씨가 C 회사를 나올 때 그녀와 동시에 그만둔 다른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바로 작년까지 하루 씨가 다녔던 D 회사의 사장이다. 2008년경, 두 사람은 C 회사를 나와서 D 회사를 꾸렸다. 2인 회사 체제였다.

 

“둘이 운영했으니까 일반 회사하고는 좀 다른 느낌인 거죠. 여러 가지가 막 엉켜지게 되는. 이곳에서 11년을 일했어요. 초반에는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월급 자체를 조금씩 가져갔죠. 초반 몇 달은 50만 원에서 60만 원 정도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는 더 많이 가져가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오르진 않았죠. 나중에 120만 원을 가져가고, 150만 원을 가져갔죠. 마지막에 나올 때가 200만 원은 살짝 안 됐고. 거기에서 실수령은 세금 빼면 더 적었죠. 딱히 별다른 복지는 없었어요. 휴가 개념도 정말 없었죠. 일 년에 여름휴가 5일 쉬는 것, 그것이 전부였어요.”

 

11년 전, 이 회사를 창업할 당시 사무 공간과 집기를 마련한 사람은 하루 씨였다. 따라서 동업이라 여겼고, 회사를 규모화하고 수입을 안정화하기 위해 자신의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반을 잡기까지 기꺼이 적은 임금을 가져갔고, 차츰차츰 자신의 임금을 늘려가는 것을 순리로 여겼다.

 

하지만 창업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사장의 입장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사장은 법적으로 사업자등록을 본인 이름으로 냈고, 따라서 한 번도 하루 씨를 자신의 동업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러 번의 설전이 있었다. 그러면서 하루 씨는 지쳤다. 갚아야 할 빚도 있었기 때문에 일은 지속해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 씨는 동업자가 아닌 직원의 위치를 받아들였다.

 

파트너인 줄 알았던 사장에게서 퇴사 압박을 받다

 

▲ 자의 반 타의 반. 하루 씨는 지금은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 회사에서 4대 보험을 들어준 지는 2년밖에 안 됐어요. 그것도 내가 넣어달라고 계속 얘길 했기 때문에 가입할 수 있었죠. 그 전에도 요구를 했지만 ‘회사가 힘들다, 네 월급에서 떼야 한다, 내 돈에서도 까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절 설득해서 안 들어줬는데, 그래도 제가 들어달라고 요구를 했죠. 나올 때 그때 가입했던 퇴직연금 위에 2백인가를 더 받고 나왔어요. 참 허탈했죠. 10년 있었는데 이 정도밖에 못 받다니 하는 거. 그리고 경기가 힘들다고 이런 식으로밖에 (나의 공로를) 생각 안 하나, 싶은 거요.”

 

퇴직하게 된 것은 하루 씨에겐 뜻하지 않은 결과였다. 일 년 매출액이 5천만 원에서 6천만 원 사이, 많을 때는 7천만 원에서 8천만 원 정도 되는 소규모 영세업체였지만, 근근하면서도 일감은 꾸준히 들어왔다. 그러다 갑자기 지난해 사장이 기약 없는 ‘무급 휴가’를 언급했다.

 

동업의 위치를 포기하고 직원으로 자리매김 당했어도 줄곧 책임을 같이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으레 해왔던 것처럼, 사장에게 회사 사정이 힘들다는 것에 공감을 표현했고, 그 위기를 함께 이겨나가자고 했다. 오전과 오후 근무를 나눠서 해보는 건 어떠냐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사장은 이에 대한 답을 회피한 채 반복적으로 회사가 어렵다는 말만 했다.

 

이런 사장의 태도를 지켜보던 하루 씨는 계속 다니는 게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장이 그렇게 빨리 자신을 정리할 줄은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기한 없는 무급 휴가를 거론했던 건 사실상 퇴사를 생각하라는 압박이었다.

 

“내가 나간다고 하니까 나이 어린 직원을 바로 뽑더라고요. 나에게 무급 휴가를 가라고 했으면서도 새 직원을 뽑은 거죠. 내가 따졌더니 본인은 혼자선 일을 못 한대요. 누군가 자기 옆에는 있어야 한다는. 그런 표현을 썼어요. 그때도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일 년 전 퇴사 과정을 떠올릴 때마다 하루 씨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직업에 대한 허탈함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배신감도 밀려왔다.

 

아직 전 직장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나는 조심스레 하루 씨에게 물어봤다. 사장이 오래전 동업자가 아니라고 했을 때, 그때 그만둘 생각은 안 했었는지. 사장은 하루 씨의 노동 값을 왜 그렇게 계산해 왔을지에 대해서.

 

“쉽게 그만두지 못했던 건 일종의 타협이었죠. ‘남자 사장’이 있다는 것, 그게 일감 받는데 쉬운 환경이었어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온전히 제가 맡아서 진행한다고 해도, 클라이언트들은 남자 사장이 있는 회사를 더 신뢰하니까요. 적게 받고 일해도 그게 더 낫겠다는 판단을 한 거죠.

 

두 사람이 했던 역할은 정말 거의 비슷했어요. 마케팅이라는 것도 홈페이지를 기반으로 했으니까요. 사장은 웹개발이 주특기였는데 웹디자인도 두루두루 잘했어요. 초반에는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대해서 저에게 많이 가르쳐 줬죠. 하지만 어느 순간 클라이언트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도 그렇고, 기획이나 코딩도 그렇고, 저도 전부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면서 협력하는 프로젝트가 줄고 제가 단독으로 맡아서 원스톱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아졌죠. 동업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일에 있어서는 파트너쯤으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나를 부려먹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맞는 것 같아요.”

 

IT 산업의 성별 분업화와 임금 격차

 

말끝이 흐려지는 하루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말이 참 멀다고 느꼈다. 법적 지식을 독점하고 권리를 선점한 사장은, 하루 씨와 동일노동을 하면서도 하루 씨의 월급 두세 배를 가져가곤 했다. 이러한 현실은 하루 씨가 수입 지출입과 세무 관리까지 전담했기 때문에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과연 하루 씨의 이력은 그녀만의 특수한 사정과 경험인 걸까?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하루 씨의 취업 과정과 첫 직장 이야기는 당시 새롭게 생겨난 웹디자이너의 일상을 대변한다. 모든 웹디자이너가 똑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업종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이 만성 야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무엇보다 고용불안 때문에 이러한 조건을 감수하고 일한다.

 

하루 씨는 잦은 야근을 피해 서울을 떠나 전주에서 일터를 다잡았지만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려온 것이나 다름없다. 제대로 노동 값을 받지도 못했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충분히 보장받지 못했다. 게다가 지역의 영세업체 근로자여서 섬처럼 고립된 채, 같은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과 어떠한 정보도 주고받지 못했으며, 부당한 노동 조건에 처했어도 그 고민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한편 첫 직장에서부터 최근까지, 그녀가 만났던 회사의 성별 구조는 IT산업의 초기 ‘성별 분업화’를 돌아보게 한다. 이를테면 개발은 남성이, 꾸밈은 여성이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이 21세기 신산업이라는 IT 분야에도 적용돼 웹 개발과 웹 프로그래밍은 주로 남성의 몫으로, 웹디자인은 여성의 몫으로 할당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의 다른 경제 분야와 마찬가지로 IT산업 종사자의 다수는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웹디자인 쪽만은 여성이 많다.

 

뿐만 아니다. IT 서비스 산업 종사자들의 열악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성별 임금의 편차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남성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받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조금 덜 받고.

 

▲ 웹 및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종사자 현황     ©한국고용정보원 2019한국직업전망

 

원자화된 프리랜서지만, 이젠 ‘여성주의’와 함께!

 

이제 하루 씨는 자의 반, 타의 반 프리랜서로서 웹디자이너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이다. 그녀는 일에 있어서는 20여 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다. 웹개발 능력과 기획력을 갖췄으며, 수많은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하며 협상력도 키웠다.

 

현재 일감을 찾는 경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인 찬스를 쓰는 것이고, 또 하나는 크몽, 이랜서, 위시켓 등 플랫폼의 ‘재능마켓’을 활용하는 것이다.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찾으면서 부딪치는 어려운 점이 있는지 물었다. 하루 씨는 먼저 웹디자인 일에 대한 적정 노동 값을 어떻게 매겨야 하는지 난감하다고 했다.

 

“홈페이지라는 게 무형의 것이잖아요. 3, 4페이지짜리 하나 만드는데 한두 시간 안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지요. 더구나 대개 추상적으로 주문을 하시잖아요. ‘깨끗하고 산뜻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만들어주세요!’ 디자이너들은 그걸 단서 삼아 그런 느낌이 보이도록 구체화해야 하는 거잖아요. 유형의 물질로 만들려면 디자이너가 여러 시간 동안 앉아서 생각하고 손을 움직여야 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분이 많아요. 또 이런 플랫폼에서는 전화번호나 이메일 등 인적 사항을 노출하면 정지 먹으니까, 저의 경력을 충분히 어필할 수가 없더라구요. 따라서 비용을 아주 낮게 책정하는 전략을 쓰게 되지요.”

 

하루 씨는 플랫폼 노동 환경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짚어보고 있다고 했다. 플랫폼에서 20% 이상의 수수료율을 가져가는 구조가 정당한가. 서비스의 질보다는 비용 절감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물어본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하루 씨는 자신의 인생 1막을 막 정리해본 기분이라고 했다. 나는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인생 2막을 구상해보라고 웃으며 말했다.

 

생계는 막막하지만, 하루 씨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여성주의와 관련된 일이라고 했다. 20대 초반, 일산에서 서울까지 7년여간 출퇴근을 하면서도 원 가족으로부터 자립할 생각을 못 했던 그녀는, 전주에 내려와서 부모 집에서 나와 과감히 독립을 선택했다. 그때 자립을 도와줬던 이들이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협동조합’의 언니들이었다.

 

하루 씨는 40대 비혼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비혼의 가치관을 나누는 ‘비비’의 작은 활동들에 기꺼이 함께하고 있다.

 

진로를 전환할 틈이 마련됐으니, 내친김에 웹 개발과 디자인의 능력을 여성주의 활동과 이을 방안을 이리저리 궁리해 봐야겠다고 한다. 그녀의 궁리에 많은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보태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주의 웹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이 그녀의 생계 유지와도 직결되길 바란다.

 

※“기록되어야 할 노동” 기획 연재를 위해 자문해주신 분들입니다. 고주영(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 박준우(프리랜서 작가), 이민영(비전화공방서울), 이충열(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최하란(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

기사입력 :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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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19/10/14 [13:19]
한때 웹개발 분야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공감 많이 갑니다. 프로그래머들도 야근 많이했지만 그래도 전망이 있었던 반면에 웹디자인 쪽은 더 열악하고 고만고만한 작은 업체에서 일하다가 나중엔 어쩔 수 없이 프리랜서로 일해야 하고 창작 분야라는 대우도 잘 못 받고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분의 일자리 얘기에서 많은 웹디자이너의 인생이 겹쳐진다는 게 더 안타깝네요. 이 분야가 눈도 빨리 안 좋아지고 허리도 나가고. 연금도 안 나오면 진짜 힘들거든요. 유망 업종이라고 손꼽혔다는 게 한숨이 나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요. 근데 충격인 건 업체 사장이 남자인 걸 클라이언트들이 선호한다는 거. 나라면 여자 사장이 더 신뢰가 갈 것 같은데.. 읽으면서 참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토닥토닥 19/10/15 [10:12]
같은 웹 디자이너로서 일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너무나 공감이 가고 안타깝습니다. 계속 저임금을 받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며 포트폴리오를 쌓은 이후로는 절대 내가 정한 임금 아래의 일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많은곳을 두드리고 업그레이드를 시켜왔지만 다른 직종의 같은 노동을 했다면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했을거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쉽지 않은길을 꿋꿋하게 해내오신데에 박수를 쳐드리고 싶어요. 여성으로서 연대하고 지지합니다.
토닥토닥 19/10/15 [10:13]
여성으로서 ,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읽으며 공감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오며 포트폴리오를 쌓고 경력을 쌓아 내가 정한 임금 아래로는 절대 일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더 높은곳을 두드리고 더 좋은 경력을 쌓아서 이전보다는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만약 다른 직종의, 남성이였으면 같은 노력으로 훨씬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여태까지 잘버텨오셨다고, 고생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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