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 공학자가 독일 항공우주센터로 간 이유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승희: 항공 엔지니어, 브라운슈바이그

하리타 2020-02-07

※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승희 이주 이력서 

 

이주 5년 차.

2015년 9월 독일 입국 및 뮌헨에서 어학 공부

2016년 8월 독일 항공우주센터 여성 항공 엔지니어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취업

2017년 1월 브라운슈바이그 공과대학에서 2년 9개월 근무

2018년 12월 영주권 취득

2019년 10월 독일 항공우주센터 재입사

2020년 현재 센터 소속 연구소에서 소형민간수송 항공기 ‘에어택시’ 개발 중

 

과학영재반 ‘유망주’에서 차별대우 받는 여성 공학자로

 

▲ 승희는 현재 항공 공학자로서 독일에서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승희는 일찌감치 수학과 과학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 때 이미 교육청 주최 ‘과학 캠프’에 참가했고, 중학교에 가서는 3년 내내 인근 대학이 운영하는 ‘과학영재반’에 다녔다. 학교 교사들은 물론 부모님도 1남 1녀 중 장녀인 승희를 전폭 지지해주었다.

 

승희는 당시 미적분까지 선행학습을 마친 영재반의 다른 아이들을 보며 “경기도에서만 모아도 이렇게 뛰어난 애들이 많은데, 세계로 나가면 나는 한낱 멍청이겠구나”라며 의욕을 불태웠다. 자유시간에도 과학 상자를 가지고 놀 정도로, 승희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분명했다. 1989년생인 승희가 성장하는 동안 겪은 사회에서는 ‘여자’라는 성별과 ‘공학자’라는 꿈이 아직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승희는 ‘어려워서 재미있어 보이는’ 물리학, 그중에서도 동역학에 흥미를 느껴 기계공학과로 진로를 좁혔다. 또, 자동차보다 비행기가 더 재미있어 보여서 항공기계공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런데 대학에 가자, 영재반 때 30%가량이던 여학생 비율은 1,000명 중 단 15명, 1.5%로 뚝 떨어졌다. 승희는 그 이유, 혹은 결과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처절하게 깨우쳤다.

 

‘남자들 말처럼, 여자들이 자꾸 꾀를 부리니까 그렇지. 만약 내가 남자들만큼 열심히 일하면 나한테 불평을 하겠어?’라는 생각은 대학 2학년 때까지만 유효했다.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학부 연구생으로 소위 ‘랩실’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폭력이 승희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웃긴 게… 여성 연구원들이 마땅한 사유를 대면서 ‘이건 제가 못해요’라고 하면 주변에선 ‘역시 여자들은 안 된다’고 했어요. 반면, 여자들이 뛰어난 성과를 내면 ‘여자애가 뭐 그러냐’는 반응이 돌아왔어요. 남자 선배나 동료들은 랩실에 모든 여자들을 한 번씩 다 울려야 한다며 ‘이번엔 네 차례’라고 시비 걸고, 전날과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면 ‘어디서 자고 왔냐’고 핀잔을 줬어요. ‘25살 넘은 여자가 화장 안 하는 건 범죄’라는 우습지 않은 농담을 하며 자기들끼리 낄낄댔고요. 성희롱이나 성추행도 기본적으로 많았죠. 처음엔 ‘하지 마세요’라는 정도로 항의했는데 전혀 소용이 없으니까 나중엔 저도 심하게 맞받아쳤어요. 똑같이 모욕감을 주려고요.”

 

승희는 그럼에도 석사과정까지 견뎠다. 연구가 재미있었고, 항공 공학 분야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여기 계속 있다간 내게 좋은 기회가 영영 안 오겠다’는 확신을 들면서부터는 더 버티기 힘들어졌다.

 

당시 지도교수는 학회에 동행하고 싶다는 승희의 요청을 ‘여학생과 외국에 나가면 안 좋은 소문이 난다’면서 거절하고, 승희의 논문을 본인이 대신 발표했다. 반면 남성 연구자들은 교수와 같이 출국해 직접 발표를 할 수 있었다.

 

임신으로 배가 불렀다는 이유로 논문 발표를 동료 남성에게 넘기게 강요하는 등, 다른 연구실들도 여성 연구원들을 부당하게 차별했다. ‘한국에서 여성 엔지니어의 미래는 없는 건가?’라는 의문이 걷잡을 수 커가자, 승희는 좌절과 불안이 자신을 다 삼켜 버리기 전에 독일로 날아갔다.

 

▲ 승희가 2016년부터 살고 있는 독일 중북부 도시 브라인슈바이그(Braunschweig). 인구는 25만여 명이며, 인근 유명 도시로 하노버(Hannover)가 있다.     ©출처: braunschweig.de

 

한국에서의 연구 경력을 인정받아 단기간에 취업

 

박사과정 진학을 염두에 두었던 승희에겐 무상 교육제도가 있는 독일이 좋은 대안이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나 ‘정’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조직 문화가 팽배한 한국보다 기본적인 원리원칙, ‘선’만 지키면 된다는 독일 직장이 나을 것 같았다. 석사학위 프로젝트였던 모핑(Morphing) 무인 항공기 개발을 비롯해 승희가 그동안 쌓은 지식과 기술은 독일에서도 통용되므로, 독일어만 어느 정도 익히면 하던 일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입국, 첫 9개월은 어학에 집중하고 나머지 3개월간 박사과정이나 연구직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3개월 내에 자리를 못 잡으면 어학 비자나 유학준비 비자로 바꿀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스스로 정한 기한이 끝나기 전에 승희에게 면접 기회가 여러 건 생겼다. 그중 독일 우주항공센터(Deutsches Zentrum für Luft- une Raumfahrt)는 마침 외국인 여성 공학자를 따로 뽑는 채용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석사 연구와 유사한 모핑 항공기 날개 설계 프로젝트도 있어서, 최종 합격이 되었다. 다만 비자가 문제였는데, 담당 공무원은 고용계약서를 보고도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취업비자로 바꿀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독일인 지인들까지 나서 관청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대사관에서 확인 편지를 받아 제출한 뒤에야 해결되었다.

 

프로젝트 참여 연구원 350명 중 단 8명뿐인 여성 가운데 한 명으로 6개월간 근무하며 승희는 다음 일자리를 부지런히 알아보았고, 공백기 없이 이직에 성공했다. 브라운 슈바이그 공과대학(TU Braunschweig)의 ‘항공기 설계 및 경량구조 연구소’(Institut für Flugzeugbau und Leichtbau)에서 모핑 기술을 적용한 민간 항공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2년 9개월짜리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는 동안에 영주권을 취득했다. 승희는 블루카드(고급전문인력 이주민을 우대하는 EU 회원국 제도로, 학사학위 이상을 소지하고 고소득 직종에 종사하는 것이 자격조건. 직종에 따라 최소 연봉은 37,128유로에서 47,600유로 이상이어야 함) 소지자였고, B1 이상 독일어 자격증도 땄기 때문에 취직(연금보험 지불) 후 단 21개월 만에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었다.

 

▲ 독일에서 승희의 첫 직장이었던 ‘독일 항공우주센터’(DLR)는 1969년 설립되었고 현재 직원 수는 8천 명이 넘는다. 퀼른에 위치한 본사를 비롯해 독일 전역에 다양한 연구시설을 두고 있다.     ©출처: dlr.de

 

노골적 성차별은 없어졌지만, 잃어버린 자신감 회복은 아직

 

한국에서 일할 때 승희를 괴롭혔던 노골적인 성폭력과 성차별은 독일 직장에서는 전혀 겪지 않는다. 성폭력 가해 행위는 해고뿐 아니라 연금 박탈 사유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알아서 조심’하는 분위기이다. 관련 교육도 철저한 편이다. 또, 남성중심적인 사회 분위기나 남성 비율이 훨씬 높은 공학 분야의 조직 환경 고려해 여성만을 위한 ‘연봉 협상 훈련’ 등의 세미나를 운영하는 곳들도 있다.

 

승희는 지금 다니는 직장에 처음 나간 날, 30여 명이 참여한 팀 회의에 여성이 자기 혼자인 것을 보고 당황했다. 알고 보니 여성 연구원 3명이 모두 출산 휴가 중이었다. 남녀 모두 24개월까지 ‘부모 휴가’(Elternzeit)를 쓸 수 있고, 계약직의 경우에도 출산 휴가는 계약 기간에서 제외된다. 다만 여럿이 협업하고, 각 자리가 대체가 어려운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연구 과제의 특성상, 직원들은 보통 자녀 계획을 세울 때 프로젝트 일정을 고려한다. 간혹 아이를 옆에 앉혀놓고 회의를 하거나, 자녀를 위해 가져다 놓은 장난감을 서로 빌려주는 직원들도 있다.

 

한국에서 여성 공학자가 출산 후 복귀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한 승희에게는 이 모든 게 신선한 풍경이다.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남성 동료들이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거나 아이 때문에 재택근무를 한다고 하면 ‘아, 여긴 가족 친화적인 좋은 직장이구나’ 감탄하면서도 ‘내가 데려가도 똑같이 받아들여질까? 외국인 여성인 나한테는 시선이 다르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직접 겪기 전까지는 안심이 안 돼요.”

 

▲ 2018년 뮌헨에서 열린 재독한국기술자협회 세미나에서 승희가 <지속적 여성 공학자 유치를 위한 연구환경 개선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내용 중 일부.     ©고승희

 

그리고 승희가 느끼는 다른 미묘한 문제가 또 있다. 여성 공학자의 비율을 높이려는 ‘적극적 조치’(과거로부터 누적된 차별에 대해 개선하고 현재의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로 고용, 승진, 훈련 등에서 우선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가 낳는 일종의 부작용일까, 여성들이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을 못 갖고 ‘여성 할당제 덕분에 자리를 얻었다’는 주변 인식에 휘둘리게 된다는 점이다.

 

승희도 외국인 여성 연구원 채용 프로그램으로 첫 취업을 했을 때 의구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내가 진짜 능력이 있나’를 확인하기 위해 권위 있는 업계 전문가의 인정에 목말랐다. 그런 마음이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로 드러났는지, 이직할 때 한 면접관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할 필요 없다”며, 승희의 경력과 성취가 적지 않다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요즘도 승희는 상사에게 업무에 대한 피드백을 자주 묻는다. 상사의 후한 칭찬에도 승희는 아직 불안하다. 한국에선 성과를 내도 칭찬을 받아본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여자들은 좋겠다. 교수들한테 웃어 주기만 하면 성적 잘 나오니까”와 같은 주변의 모함을 받았고, 성차별 의식이 내면화될 정도였다. “어떤 예쁜 여자가 고속승진을 한 걸 보면 과연 저 여자가 능력으로 거기 간 걸까 제가 의심하고 있더라고요. 망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겠다 싶었어요.”

 

‘독일 항공우주센터’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비전이 만난 곳

 

두 번째 직장인 브라운슈바이그 공과대학에서 보낸 시간은 승희가 ‘유색인종 외국인 여성’이라는 자신의 외적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초반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느꼈는데,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차차 자신이 동아시아 여성에 대한 흔한 고정관념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희는 말씨가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지만 사교성이 없는 편은 아니라고 스스로 인식한 반면, 사람들은 ‘아시아 여자들은 원래 내성적’이라고 여기는 식이었다. 고정관념을 깨려면 불편하더라도 일부러 ‘오버’를 해야 했다.

 

반면, 지난해 9월 들어간 독일 항공우주센터 ‘복합구조 및 적응시스템 연구소’(Institut für Faserverbundleichtbau und Adaptronik)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직원들을 출신 국가나 인종의 대표자로 대하기보다는 개별자로 보며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고유의 전문성을 가진 동료 연구원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

 

맡은 업무와 프로젝트도 호흡이 보다 길고 분명해졌다. 승희는 센터가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에어택시’의 자동화 공정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에서 코디네이터 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에어택시는 4인용 좌석을 갖춘 소형민간 항공기로, 요즘 세계적인 트렌드다. 독일 업계에서는 고속기차 1등석 가격에 이동 시간은 훨씬 짧도록 도시 간 항로를 개설해 출장이 잦은 직업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승희가 하는 일을 예로 들면, 탄소섬유를 에폭시 같은 수지 소재에 섞은 ‘복합소재’가 사람 손을 타지 않고도 대량생산되도록 제조 공정을 짜는 것이다. 복합소재는 가볍고 내구성이 높아서 에어택시에 적합한데, 혼합된 재료가 항공기 부품 몰드에 균일하게 도포되려면 ‘자동 감지 센서’ 등 다양한 기계들이 맞춤 설계되어야 한다.

 

아직 프로젝트 초반이라 사무실에서 특허 조사를 하거나 3D CAD 모델링 소프트웨어로 작업을 한다. 코디네이터로서 회사가 다른 대학교나 업체와 원활하게 기술을 제휴하고 공동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도 승희의 역할이다. 회사가 정한 프로젝트 목표까지 5년여가 남았고, 승희는 자신의 커리어 비전과 삶의 계획을 여기 기꺼이 맞추고 있다.

 

▲ 승희가 개발 중인 ‘에어택시’는 작은 크기의 민간항공기이다. 승희는 에어택시의 실제 승차감을 알아보기 위해 사진에 보이는 항공기에 동승해보았다.     ©고승희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독일 가족

 

독일에 와서 타고난 성별로 인한 불이익이나 차별 없이 공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승희에게 ‘일’에 있어서의 해방이라면,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해방을 겪고 있다. 스스로를 ‘한국 사회에 살기 적합한 몸’이 아니라고 말하는 승희는 ‘누가 뭘 입든, 화장을 했든 말든, 살이 찌든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독일에 오고 난 뒤에야 자기 몸으로 사는 것이 편안해졌다.

 

승희는 초등학교 4년 때 지금의 키까지 이미 자랐기 때문에 다른 애들보다 덩치가 컸고, 운동도 많이 해서 웬만한 남자애들보다 근력도 셌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소위 말하는 ‘플러스 사이즈’로 살아왔다. 그런 스스로를 납득하기 위해 승희는 일찌감치 ‘남성이라는 범주에 스스로를 넣어버렸다.’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바지만 입고 다녔다.

 

그런 승희는 독일에서 뒤늦게 꾸밈에 있어 다양한 실험을 하며 자신의 취향을 발견해 나가고 있다. “제가 의외로 귀여운 스타일이나 꽃무늬 치마 같은 것도 좋아하더라고요. 이제는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서 원피스와 후드티를 마음대로 오가고 있어요.”

 

지난해 가을 올린 결혼식 때는 가슴이 깊이 파인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부모님도 저를 사랑해주시긴 했지만 아무래도 한국 사회의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의도치 않게 저에게 코르셋을 강요했어요. 특히 엄마는 살을 좀 빼는 게 낫지 않겠니, 일도 좋지만 외모도 좀 가꿔야 하지 않겠니, 몸에 붙는 옷은 절대 입으면 안 된다고 늘 그러셨어요. 그런데 독일서 만난 남편은 내가 어떤 경험을 해왔고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했어요. 시어머니는 제게 몸을 안 숨겨도 된다고, ‘승희야, 네가 가슴이 있으면 있다, 하고 다니면 되지’ 하셨어요. 한국에서는 사랑받고 인정받으려 늘 아등바등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제가 배운 거예요.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아, 이게 사랑이구나 했어요.”

 

▲ 2019년 가을 독일에서 올린 결혼식 기념 사진.     © 고승희

 

비로소 손에 잡힐 듯한 ‘평범한 삶’

 

남편이 유튜브 방송을 해보라고 권할 정도로 열렬한 페미니스트인 승희가 원했던 삶은 사실 평범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전공 분야에서 일을 하며 사회에서 인정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 말이다. 그런 삶을 위해 승희는 늘 정직하게 노력했고, 노력한 만큼의 인정과 발전을 바랐지만 한국에서는 좌절과 분노가 먼저 따라왔다.

 

아직까지는 ‘한국을 정말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승희는 5년 뒤에도 지금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 ‘1-2년 하고 말 것처럼 빡빡하게 계획 세우지 말고, 20-30년은 이 일할 테니까 숨을 고르며 가라’는 직장 상사의 말처럼,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고 일할 것이다. 어쩌면 그때쯤 첫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직장에 딸린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것이다.

 

자원활동가로 참여했던 여성단체 ‘존타’(Zonta)에서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계획도 세웠다.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는 모토를 내세우는 이 단체에서 승희는 한국에서 온 이주여성들이 서로 돕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다. 특히 막 독일에 도착해 여러모로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20대 초중반 여성들을 모집할 것이다.

 

승희가 개발 중인 에어택시처럼, 그는 빠르고 자유롭게 삶의 여러 목적지에 차근차근 도착하고 있다. ‘세계로 나가면 나는 한낱 멍청이’라는 어릴 적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면서.

 


[여성 공학자를 늘리기 위한 독일의 다양한 민관 프로젝트]

 

독일의 이공계 분야, 이른바 MINT(Mathematik 수학, Informatik 컴퓨터 공학, Naturwissenschaft 순수과학, Technik 기술의 앞글자를 땀) 직종에는 950만 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 여성 비율은 평균 15%로 여전히 소수이다. 1천 명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15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 2018년 뮌헨에서 열린 재독한국기술자협회 세미나에서 승희가 <지속적 여성 공학자 유치를 위한 연구환경 개선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내용 중 일부.     © 고승희

 

한편, 대학에서 MINT 분야를 전공하는 여성은 2008년 6만여 명에서 10년 새 11만 7천여 명, 30% 비율로 늘어나 앞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공학자/과학자 여성 비율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독일 연방통계청 2019년 발표)

 

승희가 혜택을 본 여성할당 고용 프로그램을 비롯해 여성 공학자 및 과학자 비율을 늘리기 위한 민관 협력 차원의 다양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 전역에서 100여 개 이상 기업들이 참여하는 ‘MINT 직종 여성들을 위한 연방 조약’(Nationale Pakt für Frauen in MINT-Berufen)은 “자, MINT 하세요!”(Komm, mach MINT!)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천여 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망라한 포털 사이트(komm-mach-mint.de)를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부터 대학생, 학부모, 교사와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며 관련 전공이나 장학금, 멘토링 및 관련 통계, 교육자료, 우수사례, 행사와 구인 구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정보가 올라간다.

 

연방 교육연구부(Bundesministerium für Bildung und Forschun)는 “MINT는 직업이 아니라 관점”(MINT ist kein Beruf, MINT ist eine Perspektive)이라는 슬로건 하에 MINT 전공자 여성들을 위한 재교육과 재취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로 출산.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에게 2~3학기에 걸쳐 해당 분야의 최신 지식과 취업에 필요한 연구방법론. 기술 자격증을 갖출 수 있게 돕는 교육과정을 대학들과 연계해 진행한다.


 

※ 필자 소개: 하리타 (정세연). 현재 독일 라이프치히 거주. 그 동안 일다에서 <29살, 섹슈얼리티 중간 정산><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 독일 여성 난민들의 말하기><하리타의 월경만남>을 연재했으며, 저서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동녘, 2017)>가 있다. ‘이주’라는 삶의 모험을 함께하고 있는 이웃 여성들에 대한 큰 사랑과 존경이 이번 연재의 원동력이다.

기사입력 : 20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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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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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즌 20/02/08 [12:11]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사회가 여자들의 신체를 위축시키는 거.. 저도 외국에 나가면 많이 느끼고 다른 자유로워보이는 여성들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돼서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어릴적부터 몸에 밴 습관이 마음먹는다고 쉽게 바뀌지 않거든요. 몸에 새겨진 차별인 것 같아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신체만이 아니라 자신감 갖지 못하게 만들고 대놓고 차별하면서 문제의식 못느끼고 문제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걸로 몰고... 
승희씨의 인터뷰 보면서 진짜 공감이 많이 갔어요. 용기있고 멋진 분이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저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능력발휘도 하고 살려고 해요. 
독자 20/02/08 [13:29]
89년생의 이야기인데 아직도 대학과 랩실이 이렇게 차별적이라는 게 충격이네요. 여성 인재들을 다 잃겠습니다. 인터뷰하신 분 현재 하시는 프로젝트 잘 되길 바랍니다. 
이슬 20/02/09 [01:21]
승희님 인터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중간 중간 몇 번 울컥했어요. 독일에 오길 잘 했다, 는 마음이 오래 오래 지속 되길 바랍니다. 멋져요! 
이리오 20/02/10 [14:09]
멋집니다! 승희님을 응원합니다~~
마린 20/02/24 [16:42]
승희님 너무 멋지신거같아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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