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었어요?” 11년차 ‘여행자’로 사는 베를린의 여성 셰프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미혜: 셰프 및 독립영화 프로듀서, 베를린

채혜원 2020-06-27

※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편집자 주

 

미혜 이주 이력서

 

이주 11년 차.

2000년부터 6개월 일하고 6개월 여행하는 노마드 인생 시작

2009년 런던으로 어학 비자 받고 도착

2011년 우연히 여행 왔다가 베를린에 거주 시작

2012년 젠트리피케이션 주제로 개인 전시회 “APART” 개최

2013년 주독한국문화원 ‘디아스포라’ 영화제 프로그래머

2012년~현재 독립영화 프로듀서

2017년~현재 레스토랑 KIMCHI PLANET 공동 운영

 

▲ 베를린에 있는 레스토랑 김치플래닛(KIMCHI PLANET) 앞에 셰프 미혜가 서있다.  ©채혜원

 

베를리너는 물론 여행자에게도 사랑받는 베를린의 인기 있는 동네, 크로이츠베르크. 동네 한가운데 흐르는 운하를 따라 걷다 보면 한국 레스토랑 ‘김치플래닛’(KIMCHI PLANET)이 나온다. 실내테이블이 다섯 개 정도로 작고 고즈넉한 김치플래닛에서는 비빔밥, 잡채, 불고기, 닭갈비 등 대표적인 한국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오픈형 부엌에서는 셰프가 혼자 일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가 손님을 맞이한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및 이동 제한조치(lock down)로 가장 크게 변화한 모습은 ‘김치플래닛’처럼 동네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은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던 이웃들의 공간이 한순간 없어졌다. 지난 5월 중순부터 규제가 완화돼 조금씩 예전 모습을 되찾고는 있지만, ‘김치플래닛’도 현재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테이크아웃 서비스만 제공하고 있다.

 

‘김치플래닛’의 셰프인 미혜는 지난 3월 중순부터 평범한 일상을 잃었다. 정부가 소상공인 지원 대책을 마련한 덕에 3개월간 가게 월세와 보험료 부담은 덜었지만, 테이크아웃 서비스만 제공하면서 매출이 크게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혜는 잊지 않고 가게를 들르는 손님을 위해 주중에 매일 가게를 지키고 있다.

 

‘김치플래닛’의 고객은 대부분 동네 주민이다. 그러다 보니 미혜는 손님이 올 때마다 그 손님의 구체적인 취향까지 다 알고 있다. 라면을 주문할 때 스프를 조금만 넣고 야채를 많이 넣어 먹는 어린이 손님, 올 때마다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는 터키 손님, 점심시간마다 직장 동료와 함께 ‘오늘의 메뉴’를 즐기는 건축사무소 손님들 그리고 가게 옆 여성공동주택 ‘베기네호프’에 사는 할머니 손님들까지. 남녀노소 모두 찾는 미혜의 가게를 보면 자연스레 영화 <카모메 식당>이 떠오른다. 핀란드 헬싱키가 아닌, 독일 베를린의 카모메 식당.

 

돈’ 아닌 ‘시간’ 선택, 베를린에서 한식 셰프로 사는 일상

 

미혜가 처음 다른 사람을 위한 요리를 시작한 것은 교회였다. 1990년대 후반 패밀리 레스토랑이 한참 인기가 많았을 때, 미혜가 다니는 작은 교회에서는 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김밥 등 분식을 자주 사주곤 했다. 하지만 미혜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마음에 걸려 교회에 제안했다. 아이들에게 사주는 식비로 재료를 사게 해주면,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만들어보겠다고. 그때부터 미혜는 아이들을 위해 멕시코, 미국, 호주 등 다양한 패밀리 레스토랑 메뉴를 직접 요리해줬다.

 

넉넉지 않아도 베풀고, 가슴 아픈 이야기에 함께 눈물 흘리는 공감력을 지닌 미혜의 요리는 늘 따스하다. 2016년 세월호 유가족이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가게로 초대해 따뜻한 밥상을 차렸고, 오래전부터 독일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온 선생님들을 위해 종종 고향의 음식을 선물하며, 주변의 가난한 아티스트 친구들을 위해 언제든 가게 문을 열어놓는다.

 

현재 미혜가 셰프로 일하고 있는 ‘김치플래닛’은 이전에 파독 간호사 선생님 두 분이 은퇴 이후 운영하는 ‘코레’(core)라는 다른 한식당이었다. 미혜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다가 선생님들이 가게를 팔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혜는 첫눈에 반한 이 가게에서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가게 권리금을 혼자 내기 어려운 데다 가게 운영과정에서 처리해야 하는 복잡한 서류 작업을 해줄 동업자가 필요했다. 마침 상황이 맞는 재독 교포 1.5세 친구가 동업 제안을 받아들였고, 2017년부터 미혜는 김치플래닛의 셰프가 됐다.

 

▲ 한식당 ‘코레’는 2017년부터 미혜가 셰프로 일하는 ‘김치플래닛’이 되었다.   ©김치플래닛


코로나 이전에 가게를 여는 시간은 월~금 12시부터 오후 6시였다. 보통 오전 9시, 재료 준비로 미혜의 일과가 시작되고 12시부터 3시까지 손님들로 테이블은 계속 차 있다. 3시 이후 조금 시간이 나면 김치를 담그고 각종 양념을 만들며 다음날 쓸 고기를 썰어놓는다. 이후엔 정리와 청소로 일을 마무리한다. 고정 메뉴는 비빔밥, 불고기, 잡채 등이지만 시즌별로 고등어 김치찜, 비빔국수, 갈비, 김밥 등 특별 메뉴도 선보인다. 미혜는 “식당 일의 대부분은 요리보다 정리하는 일이라, 계속 치우고 닦고 청소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고 말했다.

 

미혜는 셰프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는다. 점심 장사만 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진 못해도 대신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 손님도 거의 단골이라 가게에 가까운 친구들이 놀러 오는 기분이다. 단골손님 외에도 독일 사회 내 한식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집밥처럼 한식을 즐기는 나이 드신 손님이나, 타지 생활하며 가장 그리운 한식을 먹고 싶어 들르는 한국인 손님도 많다.

 

여느 식당처럼 점심, 저녁 장사를 다 하면 돈은 더 많이 벌 수 있지만 미혜는 돈 대신 점심 장사만 하는 ‘시간 부자’를 택했다. 동업자 외에 가게 오픈 때부터 함께 일해 온 든든한 지원군인 직원들도 큰 힘이 된다.

 

“한국에서는 돈도, 시간도 없었지만 베를린에서는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시간 부자가 됐어요. 사계절은 물론 하루하루 다른 온도와 바람, 하늘색의 변화를 천천히 보고 느끼며 살아요.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주어져요. 물론 지금도 뭔가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과 불안은 있어요. 서른 살 아무 생각 없이 한국을 떠났는데, 어느덧 마흔이 넘었으니까요. 늘 계획 없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 않을까 싶어요.”

 

▲ 비빔밥, 불고기 등 김치플래닛의 대표 메뉴. 이 외에도 시즌별로 비빔국수, 닭갈비, 갈비 등을 판매한다.   ©김치플래닛


‘이렇게는 살 수 없어’ 11년 전 도망치듯 런던으로 떠나다

 

“나는 이런 식의 삶이 맞지 않았다. 어딘가에 일정 기간 머물다 보면, 금방 그곳에 뿌리내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유전자가 내게는 없었다.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내 뿌리는 굳건하지 못해서 미풍만 불어도 몸이 휙 날아갔다. 내게는 식물처럼 싹을 틔울 능력이 없었다. 나는 대지로부터 수분을 빨아들이지 못했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민음사, 2019) 중에서

 

미혜는 2000년부터 1년 중 6개월은 일하고 6개월은 여행 다니는 노마드의 삶을 시작했다. 책 <방랑자들>의 문구처럼 미혜는 언젠가부터 길 위에서 사는 시간에 익숙해갔다. 10년 넘게 ‘독립영화 프로듀서’와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갔다. 거의 매일 밤샘 작업을 해야 했고, 늘 마감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사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사는지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가진 게 많진 않았지만, 외국에서 사는 여러 친구들 덕분에 미혜는 틈틈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인도를 시작으로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까지.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나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갈수록 힘이 들었고, MB 정권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어 한국에서 더이상은 못 살겠다는 생각도 컸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고 친한 친구가 살고 있는 런던으로 우선 떠났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비자를 받아야 영국 입국이 가능했던지라, 한국에서 영국 어학원 등록증, 집 계약서, 건강 확인증, 재정 증명 등을 모두 마친 후 어학 비자를 받아 출국했다. 미혜가 딱 서른이 되던 해였다.

 

런던에 도착했지만, 살인적인 물가의 영국 일상을 살아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매일 6시에 일어나 식당, 청소, 민박집 요리 등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하고 오후엔 어학원을 가야 했다. 어학 비자를 받고 입국했기 때문에 결석을 자주 하면 바로 추방이었다. 새벽부터 일하며 힘들게 돈을 벌어도 겨우 월세 정도만 충당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구를 만날 수가 없었고, 주변에는 모두 영국 대학을 가기 위해 부모의 지원으로 런던에 도착한 부자 친구들뿐이었다.

 

버스를 타는 것조차 사치였던 런던 일상에서 미혜는 다시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봤자 배낭 하나가 전부. 적어도 길 위에서는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돈 없이도 여행할 수 있었던 비법은 ‘카우치서핑’(Couchsurfing, 소셜 네트워트 커뮤니티. 호스트가 되어 무료로 숙박이나 여행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반대로 게스트가 되어 호스트의 집에서 머물 수 있는 전 세계 플랫폼)과 ‘히치하이킹’(hitchhiking, 여행 중 이동을 위해 다른 사람의 차를 타는 것) 덕분이었다.

 

“카우치서핑은 단순히 숙박을 제공받는 게 아니라 문화교류였어요. 그래서 숙박을 제공하는 호스트도, 잘 공간을 제공받는 게스트도 각자의 프로필을 자세히 써놓는 것 같아요. 저는 요리, 영상 제작자의 키워드 때문에 다양한 예술가를 만났고, 한국요리를 좋아하는 호스트를 많이 만났어요. 늘 고추장, 된장을 싸 들고 다니면서 어딜 가도 한식을 해줬고 호스트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미혜는 런던을 떠나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영국 도시 글로스고에서 6명의 청년이 모여 사는 집에 머물렀다, 그들과 함께 한국 영화를 보고 그들이 듣는 예술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0개 국어를 하는 한 대학교수 집에 머물렀는데, 다민족을 연구하는 교수라 한국에서도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와는 파전을 만들어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연히 들른 여행지인 베를린에서 9년째 체류 중

 

영국을 여행한 후 암스테르담, 아인트호벤, 뒤셀도르프를 지나 도착한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다. 미혜에게 베를린은 도착 과정부터 특별했다.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터키 할아버지는 이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노이쾰른’이라는 동네에 미혜를 내려줬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미혜에게 이웃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베를린의 새로운 동네에서는 늘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봐 주는 이주자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카우치서핑 호스트로 만난 체코계 독일인 베로니카와는 친구가 되어 3개월 넘게 그의 집에서 지냈다. 베로니카는 미혜와 동갑인 데다 같은 영화 프로듀서 일을 하고 있어 서로 공감대가 컸다. 특히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거주자들이 둥지에서 내쫓기는 현상)으로 인한 재개발 현장과 공동체가 해체되는 모습을 취재하던 미혜는 베를린 역시 이 문제를 크게 앓고 있음을 발견했다.

 

미혜는 베를린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자신의 둥지에서 쫓겨나야 했던 예술가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관련 집회가 계속 연이어 열렸고,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주제로 작업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스페인 친구의 제안으로 미혜는 한국에서 찍은 영상물과 사진을 모아 개인 전시회 <APART>를 열기도 했다.

 

▲ 베를린 노이쾰른에서 열렸던 미혜의 개인 전시회 ‘APART‘ 중 영상 작품 모습   ©미혜


우연히 들른 여행지인 베를린에서 미혜는 런던과 달리 가난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삶을 만났다. 체면치레도 없고, 전 세계에서 온 아티스트들이 돈 없이도 자신의 작업을 열심히 하는 도시였다. 런던과 달리 베이비시터,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면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관공서에서 영화와 문학 쪽 직업군으로 일하고 있으면 쉽게 체류증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넉넉한 재정도 없고 보험도 없는 상태였는데, 5개국 출신 영화 및 문학 분야 예술가면 체류증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어요. 수혜국 중 한국이 있었는데, 제 짐작에 파독 간호사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1년 체류증을 받았고, 그때부터 여러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그간 한국에서 해온 작업으로 전시회도 열었고, 여러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섹션을 만들어 영화제 프로그래머 일도 했고요.”

 

1년 체류증을 받은 후 미혜는 유학준비 비자로 한 번 더 비자를 연장했고, 이후 프리랜서 아티스트 비자와 셰프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 어느덧 9년째 베를린에 살고 있다. 전체 시민 중 4명 중 1명이 외국인이고, 1인 가구 비율이 52%에 이르며 8만여 명의 난민이 살고 있는 다문화 도시 베를린은 방랑자 기질의 미혜가 10년 가까이 머물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었다.

 

▲ 지난해 베를린 쿨투어포룸에서 열린 ‘Das dritte Land: 제3의 자연' 전시회 오프닝 행사에서 미혜가 직접 만든 ‘꽃떡’으로 케이터링 하는 모습.  ©채혜원

 

이주자로 겪는 일상의 폭력, 생활동반자들 덕분에 이겨내

 

이주자에게는 때로 일상이 폭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미혜에게도 그렇다.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들이 바지를 내려 성희롱을 하고,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며 가게에 쓰레기를 잔뜩 던지고 가는 일을 겪었다. 대중교통에서 성희롱을 당해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우리보고 어쩌라고?’ 반응을 마주하는 일상 자체가 엄청난 피로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독일인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봤자 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냐는 핀잔을 듣거나, 혹시 그 남자들이 당신에게 호감이 있어 그런 것 아니냐는 또 다른 언어폭력에 노출될 뿐이었다.

 

일상 속 폭력을 이겨내며 미혜가 9년째 베를린에서 살고 있는 것은, 가족과 다름없는 플랫메이트 덕분이다. 미혜는 베를린에서 ‘베게’(WG, Wohngemeinschaften), 즉 셰어하우스와 같은 공동 주거 형태의 집에서 살고 있다. 보통 방은 혼자 쓰고, 주방과 화장실 등 공용 공간은 함께 쓴다. 현재는 재독교포 1.5세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과 함께 살고, 이전에는 시리아 형제와 일본 남성, 한국 남성과 함께 살았다.

 

“2017년 겨울, 베를린에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이었어요. 그 눈을 뚫고 내가 해준 밥을 먹으러 가게로 와준 손님들 덕에 마음이 따뜻한 날이었죠. 그날 집에 갔는데, 같이 사는 시리아 형제가 맛있는 저녁을 하고 있더라고요. 시리아도 한국처럼 늘 ‘밥’과 관련된 인사를 해요. 얼굴만 보면 ‘미혜 밥 먹었어?’ ‘미혜 배고파?’라고 물었거든요. 당시 살던 집이 팔리면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현실을 모른 척하고 우리 모두는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어요. 시리아 형제에게 한국말로 ‘맛있어’를 알려주자 그들이 연신 웃으며 따라 했어요. ‘맛있어, 맛있어!’. 과거에도 지금도 같이 사는 이들이 큰 힘이 되어줍니다.”

 

국적, 성별 등에 상관없이 함께 사는 거주 형태라 안 맞는 플랫메이트를 만나면 일상이 지옥이 될 수도 있는데, 미혜는 함께 사는 생활 동반자들 덕에 새로운 가족을 만난 기분으로 산다. 현재 미혜가 살고 있는 세 여자 집은 아무리 바빠도 독일식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주로 한식으로 밥을 지어 같이 먹는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눈물 흘리며 가까운 거리에서 일상을 나누며 산다.

 

▲ 미혜(가운데)의 베를린 가족, 함께 사는 세 여자.   ©채혜원


“지난해 봄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날, 베를린의 큰 벼룩시장이 열리는 마우어파크에 맥주 한 병을 들고 앉아있었어요. 봄이 오는 길목이라 그런지 모두가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갑자기 인디언 속담이 생각났어요. 인디언은 말을 타고 막 달리다 아무 이유 없이 한참을 서 있을 때가 있는데, 너무 빨리 달린 탓에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기다리는 거라고요. 과거에 비해 베를린에서 보내는 삶의 속도는 느려졌지만, 내 몸과 영혼이 일치하는 속도로 살고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한국을 떠난 지 11년째지만 여전히 ‘방랑자’로 살고 있는 미혜. 지금도 자신을 여행자라고 생각하는 미혜가 바라는 것은 크지 않다. 그저 건강하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 그를 보면서 정착도, 도착도 않은 채 이어지는 긴 방랑도 ‘이주’의 한 형태임을 배운다. 길 위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미혜의 이유 있는 긴 방랑을 응원한다.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 둔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대부분은 짧은 문장이나 그림들이지만 이따금 신문 기사 일부를 베껴 적기도 한다. 때로는 군중 속에서 어떤 형상이나 인물이 나를 잡아끌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그를 쫓아가서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예정된 일정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중에서

 

▲ 베를린의 대표적인 벼룩시장이 열리는 마우어파크 풍경   ©채혜원


[독일 요리업계 성차별 고발하는 ‘페미니스트 푸드클럽’]

 

독일에서 방송을 통해 푸드 쇼를 진행하거나 수많은 요리책을 내서 유명해진 셰프를 보면 대다수가 남성이다. 최고로 손꼽히는 셰프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도 팀 멜쳐, 프랑크 로진, 알폰스 슈벡, 크리스티안 라흐, 요한 라퍼 등 모두 남성이다. 독일 여성 셰프는 다 어디로 간 걸까.

 

독일요리사협회 자료에 따르면, 현재 독일 내에 약 45만 명의 요리사가 일하고 있다. 이중 독일인은 약 31만 명, 외국인은 약 14만 명이다. 성별 관련한 통계를 보면, 전체 남성 요리사와 여성 요리사 수는 크게 차이가 없다. 반면 수석 셰프와 같이 식당 내 높은 자리에서 일하는 남성은 17,759명인 점에 비해 여성은 3,782명으로 남녀 간 큰 격차를 보인다. 또한 요식업계 성별 임금 격차는 17%로 알려져 있다.(독일의 성별 임금 격차는 21%, 유럽 평균 성별 임금 격차는 16%다.)

 

이에 베를린에서는 업계 내 여러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셰프 네트워크인 ‘페미니스트 푸드 클럽’(Feminist Food Club)이 설립됐다. 이 네트워크는 2017년 1월, 업계에서 일하는 메리 셔프와 루스 바렛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요식업계에 종사하는 여성(트렌스여성과 남녀 아닌 제3의 성별 뜻하는 논바이너리[non-binary] 포함)만 회원으로 받는다. 현재 네트워크에는 약 70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 베를린에서는 최근 ‘푸드’와 ‘페미니즘’을 잇는 행사가 종종 열린다. 이미지는 지난 2018년 6월 베를린에서 열렸던 행사 이미지.   (출처: berlinfoodstories.com)


‘페미니스트 푸드 클럽’은 무엇보다 업계 성차별과 계급 및 인종차별 문제를 폭로한다. 클럽 멤버인 비건 채식 요리사 소피아 호프만은 독일 매체 도이칠란드풍크쿨투어(Deutschlandfunkkultur)와의 인터뷰에서 “요식업계에서 성폭력 문제가 만연해있다는 것은 많은 여성 셰프들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투(#MeToo) 운동을 계기로 업계에서 적극적으로 관련 대책 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먼저 여성들이 네트워크를 맺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음식 세계에는 페미니즘이 필요합니다. 이에 우리는 업계 여성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강화함으로써 더 나은 업계로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보다 포용적이고 다양하며 지속 가능한 미식의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현재 클럽 회원들은 한 달에 한번 정기모임을 갖고, 일하면서 필요하다고 느끼는 여러 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한다. 각자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털어놓고 서로에 대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와 함께 이들은 베를린에서 ‘여성이 운영하는 가게 지도’를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약 160개 식당을 찾아 지도로 만들었고, 메일(info@feministfoodclub.com)을 통해 누락된 곳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다.

 

‘페미니스트 푸드 클럽’은 홈페이지(https://www.feministfoodclub.com) 글을 통해 “실제 유명한 여성 요리사가 적은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자료를 모으기로 했다”면서 “여성 운영 식당 지도 제작 외에도 업계 여성의 경력 개발, 강압적이고 공격적인 업무환경에서 영향받는 건강 상태 지원 등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 필자 소개: 채혜원. 독일 베를린 거주. 한국에서 여성매체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국제 이주·난민 페미니스트 그룹 <International Women Space> 멤버로 활동 중이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유럽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chaelee.p@gmail.com

기사입력 :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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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 20/06/27 [12:16]
왕 부러워요, 미혜 셰프가 만든 요리를 먹는 사람들이. ㅎㅎ 엄청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멋진 분이네요.
jiwoo 20/06/27 [15:21]
좀 귀여우시다. ^^ 동거인들과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면서 함께 웃게되는 긍정의 힘이 느껴집니다. 셰프로 산다는 게 힘든 점도 많겠지만 적게 벌어 적게 쓰고 시간을 버는 삶이 참 좋아보이네요. 나는 내 몸과 영혼이 일치하는 속도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구요. (버겁다고 느끼는 건 내 몸이 아니라 내 영혼인지도 ㅠㅠ) 
리엔 20/06/27 [18:41]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이제 여러곳을 여행하며 사는건 힘든 시대가 도래한 거겠죠 ㅜㅜ 언젠가 베를린에 간다면 미혜님 식당에 꼭 가보고싶어요.
루미 20/06/28 [15:12]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거 좋아요~ ㅎㅎ
20/07/09 [12:55]
우리 동네도 이런 식당이 생기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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