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를 겪고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

<폭력 그 이후의 삶> 불법촬영, 데이트폭력 피해자의 회복 에세이

최은 2021-07-20

-젠더폭력 생존자들이 기록하는 <폭력 그 이후의 삶>을 연재합니다. 젠더폭력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피해와 저항과 생존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본 기획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나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다. 그리고 생존자다.

 

그래, 생존자. 가해자와 싸워오면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붙여준 이름표다. 고난을 겪고도 살아 돌아왔다는 것,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 가해자에게 있어서 ‘생환한 피해자’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는 더 이상 가해자에 ‘의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생존자라는 단어에는 내가 고군분투한 흔적이 남아있고, 치열하게 살아남은 자국도 선명히 들어있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이긴 것’이라는 말을 무척 많이 들었다. 재판은 아직 한창이고, 2차 3차 피해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심에서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고개를 들어 앞길을 보면, 구만리쯤은 남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갈 것이다. 묵묵히 걸어나가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 내가 겪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 공판 당일, 서울북부지방법원 앞에서 다큐멘터리 기록을 위한 인서트를 촬영하는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법원 내 촬영은 불가능하다.

 

남자친구 핸드폰 속, ‘거래’되고 있던 내 나체사진

 

가해자는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였다. 내 첫 연애 상대였으며 나보다는 다섯 살이 많았다. 연애 기간이 차오르고 결혼 이야기가 나올 무렵이었다. 나는 남자친구의 핸드폰에서 내 나체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나는 잠들어있었고, 적나라한 내 모습은 음담패설과 함께 그의 지인 사이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사진을 전송받은 사람이 나의 지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불법 촬영물을 서로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다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피해자는 “물물교환”, “가성비”, “거래”, “흥정”, “(기브 앤)테이크” 등의 단어 아래서 재화로 유통되었다. 직접 촬영한 것은 더 가치 있게 대접받았고, 그렇지 못하거나 수위가 낮은 것은 호응을 받지 못했다. 가해자들은 출신 대학을 바탕으로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내 눈으로 보았던 것은 열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는 가해자와 수십의 피해자였다. 다른 성범죄 사건의 영상을 공유하기도 했고, 새로운 촬영물을 찍어올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아주 작았다. 교정도 10분이면 가로지를 수 있었고, 학과도 몇 개 없었다. 가해자와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이었다. 그들에게 이런 범죄는 아주 익숙한 일 같았다. 옛날부터 어떻게 해야 성범죄로 고발을 당해도 무죄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어떤 학생을 건드려야 미투(#MeToo) 고발을 당하지 않을지 설전을 주고받기도 했다.

 

내가 당한 피해 역시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가해자와 그의 친구들은 나를, 집안에 돈도 없고 능력도 부족한데다가 나이만 먹어가는 한심한 20대 여성으로 프레이밍 했다. 반면에 그들의 배경은 남달랐다. 누구는 재벌가 손자였고, 또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의 아들이었다. 자신들이 소유한 것이라며 수십억에 달하는 아파트 내부 사진을 보내 자랑하기도 했고, 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은근슬쩍 흘리기도 했다. 다른 가해자는 모교 교수가 되기 위해 유학을 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평범했다. 그것은 곧 뒤떨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사회적 위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건 인지하지도 못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피해를 당해 마땅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가해자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해리 장애

 

피해 정황을 처음 확인하였을 당시의 나는 지속적인 데이트 폭력으로 정신이 피폐했다. 가해자는 심심찮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졌다. 기분이 나쁘면 달리는 차에서 내리라는 말도 곧잘 내뱉었다. 그때마다 어딘지도 모르는 도로 위에 버려지지 않기 위해 완강히 버텨야만 했다. 바람을 피운 흔적을 들켰음에도 나를 의부증 환자로 몰고 갔다. 내가 몇 차례나 성병에 걸리자, 가해자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 아니냐며 고함을 치고서 잠적하기도 했다. 가해자가 겪은 모든 나쁜 일들은 나에게 화살이 되어 꽂혔다. 나는 그때마다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두고 사과해야만 했다. 눈앞의 분노를 잠재우는 게 먼저였다.

 

가해자는 줄곧 말했다. “나랑 헤어지면 앞으로 똥차밖에 못 만나. 내가 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남자야. 나랑 헤어지고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사회생활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가해자의 친구들도 합세해서 저 말이 진리라도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실처럼 느껴졌다. 친구들 모두가 내 연애를 만류했지만, 나는 가해자가 내게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과격한 행동과는 다르게 그가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 가해자와의 관계에서, 나는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일러스트 제작: 두두사띠)


그런 상황 속에서, ‘활어’라고 지칭되곤 했던 내 신체 사진은 정신에 과부하를 걸었다. 해결 방법은 깔끔했다. 내가 처한 현실을 잊게 된 것이다. 가해자와 바람을 피운 여자들이 나를 향해 불쌍하다며 낄낄댔던 대화를 잊었다. 살집이 없는 나의 몸이 만족스럽지 않으니 이번에는 글래머러스한 여성과 잠자리를 하겠다는 가해자의 말을 잊었다. 경찰인 여성과 잠자리를 할 땐 불법촬영을 하지 않겠다는 특혜를 잊었다. 내 몸을 두고 더 심한 촬영물을 계획하던 작당도, 나를 데리고 ‘윤간 이벤트’에 가려 했던 것도 잊었다. 그들이 직접 촬영해 불법 포르노 사이트에 판매했던 피해 사진들까지, 모두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일 년 전과 오늘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리 장애는 기억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해서 이따금 모든 사실이 상기될 때가 있었다. 내 마음은 나아질 겨를도 없이, 매번 정신적 지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아직 내 옆에 있는 가해자는 (당시 나의 기준에 비춰볼 때) 상냥했고, 내가 확인한 증거 속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연인을 처벌할 용기도, 이것을 영영 묻고 지낼 태연함도 없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지만,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다. 꿈을 꾸면 현실이 악몽이어서 안도하는 내용뿐이었다. 자꾸만 창문으로 내가 뛰어내리는 환영이 보였다. 당시에는 죽음만큼 편한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아픈 가족을 두고 차마 먼저 목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책상다리에 전깃줄로 손목을 동여매고 지새우는 날들이 많았다.

 

나의 지지자, 친구들이 뭉쳤다

 

내 이상 반응을 친구들이 알아챘다. 데이트 폭력으로 자주 하혈을 하고 앙상해져 가는 모습을 보아왔던 친구들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이내 완벽한 내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친구들의 마음에 힘입어 나는 조금씩 삶에 가까워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비집고 어떻게 싸워나갈 것인가를 골몰하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배운 능력을 펼쳐 이 상황을 타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하염없이 가해자들을 향해 죄책감을 가지는 내 정신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가스라이팅이 들어찬 내 머릿속을 박박 긁어냈다. “네가 사랑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었다고 해서, 그게 네가 범죄를 당해야 했던 이유는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해서 네가 배신한 것도 아니야.” 친구는 가해자들이 얼마나 악랄한 놈들인지, 얼마나 한심한 종자들인지 특유의 유머러스한 말들로 나를 설득했다.

 

가해자들은 내게 커다란 벽과도 같았다. 갓 대학을 졸업한 나에게 가해자들은 너무나 대단해보였다. 차를 몰고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사소한 것부터, 인터넷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지내는 것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가해자들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가진 위력에 내 입이 막힐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친구의 조롱 섞인 말들을 들으며 그들의 위치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됐다. 지금에서야 의문이 든다. 가해자들이 자기과시를 하며 늘어놓았던 말들은, 전부 진실이었을까?

 

▲ 영화를 전공한 친구는 내가 겪은 사건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찍어주겠다고 나섰다. 촬영하기 전 준비하는 모습. 지금까지만 해도 수십 시간의 촬영분이 모였다. (필자 제공 사진)

 

또 다른 내 친구는 전공을 살려 다큐멘터리를 찍어주기 시작했다. 친구는 가해자들이 어떤 판결을 받더라도, 내가 싸운 과정이 의미 있는 흔적으로 남기를 바랐다. 한 달에 몇 번이고 만나서 영상을 촬영했다. 내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태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모든 게 녹화 되었다. 고소를 결심하며 가해자 처벌 의지를 불태울 때도 있는가 하면, 온통 무너진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눈물만 흘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느끼기에도 나는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못하던 과거를 떨치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고, 고소장을 접수했다.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내려 분투하기도 했다. 재판을 기다리며 무작정 시간을 보내기보다, 친구들과 함께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갈 때 드디어 내가 삶을 이겨내고 있구나, 느껴졌다.

 

문예창작을 전공한 친구들은 지인들과 함께 대자보를 작성하고 학교에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서면을 작성하여 제출했다. 또 여러 시민단체에 연락해 사건을 알리고 연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는 사건을 알릴 카드 뉴스를 만들었다. 고소 이후, 내 생활반경을 모두 아는 가해자의 보복을 염려하여 공간을 내어준 친구도 있다. 동기들은 나의 불안정안 상태를 살피려 영상통화를 걸어 수시로 내 모습을 살피기도 했다.

 

나와 친구들만 의기투합했던 것은 아니다. 가해자들도 서로를 전폭적으로 도왔다. 그들의 연대는 새로운 형태의 가해였다. 피해자들의 신상은 뉴스 보도와 동시에 학교와 졸업생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내 개인정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해자의 인적사항은 떠돌다 못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소문의 근원지는 가해자와 그의 친구들이 속한 학과였다. 가해자의 친구는 거짓된 주장을 바탕으로 피해자 측을 향해 손해배상 소송을 걸기도 했다. 사건 공론화를 막으려는 방해 공작도 있었다. 그 결과 많은 뉴스와 방송들이 재편집되거나 삭제되었다. 우리는 반성 없이 발악하는 가해자들을 보고 다짐했다. 끝까지 싸우자고. 졸업생, 재학생 가릴 것 없이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반면 학교는 우리의 움직임을 못마땅히 여겼다. 가해자들이 ‘전공을 살려’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어지간히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는 이전부터 성범죄를 적극적으로 묻어왔다. 그러니 언론까지 동원해 공론화를 하는 우리가 고깝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춘다면 사회건, 학교건 간에 무법지대로 남을 게 뻔했다. 우리는 그렇게 예민한 종자들이 되어 갔다.

 

학교의 처벌 약속은 매번 번복되었다. 숫제 가해자들을 가엽게 대하는 것 같았다. 경찰 수사 단계만 끝나면 처벌을 논의해보겠다는 말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공론화 이후 어떤 교수는 수업 시간에 피해자들이 학교의 유명세를 이용하는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너희도 황금폰이 필요하냐”는 농담을 던졌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농담이 될 수 없는, 명백한 조롱이었다. 총학생회에서 진행한 전 학년 피해 설문조사가 그나마 진상규명의 전부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는 가해자들만의 모교 같았다. 나도, 다른 많은 피해자들도 모두 학교가 보듬어야 할 학생이었고 졸업생들이었다. 억울하고 원통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친구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가해자들은 전공을 가지고 나쁜 쪽으로 사용했어. 학교가 우리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어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배워도 악용하는 반면에, 우리는 그러지 않았잖아. 우리도 이 학교 출신이야. 이렇게 배운 것을 가지고 피해를 회복하고, 또 연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어. 학교의 가르침대로 예술을 사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야.”

 

▲ 학교에 붙일 대자보 초안을 디자인하는 과정. 결국에는 디자인과 내용이 모두 바뀐 대자보가 게시되었다.


친구들을 인터뷰하다

 

나는 원래 글을 썼다. 하지만 여러 정신질환과 해리 장애를 겪으며 언어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회화하듯이, 가장 쉽고 기본적인 단어만을 사용해서 대화했다. 개념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어떤 단어를 말하고 싶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겨우겨우 스무고개를 통해 얻어내는 방식이었다. 아주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단어조차도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글도 쓸 수 없었다.

 

미래도, 현실도, 심지어는 내 재능까지도 잃어버린 이 암흑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최소 재판이 끝나는 시점, 최대 내가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나는 이 어두운 시절을 기록해서 빈틈없이 터널 밖으로 가져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리 어두운 역사라도 태양 아래에 있으면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이 시간을 버린 채 보내기보다는 무언가로 만들어내야 했다.

 

나는 친구들처럼 외국어에도, 영상에도, 그림에도 재능이 없으니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글을 다시 써보기로 했다. 거의 날마다 기록을 남겼다. 영어 일기도 쓰면 실력이 향상된다는데, 모국어 일기야 노력하면 응당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 한국어능력검정시험 문제집을 구해서, 자칭 활자 재활 치료도 들어갔다. 책을 넘기면 한 장꼴로 악몽이 떠오르니, 최대한 간결하고 짧은 글을 구해다 읽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한탄뿐이던 기록에 유의미한 문장들이 적히기 시작했다. 기억을 종종 잊었으므로 매일의 사건들도 최대한 빠짐없이 적었다.

 

창작이라는 행위는 무척 능동적이다. 피해와는 다르다. 창작은 당할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과 무언가 해내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뒤처지면 그대로 가해자들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렸다. 법을 공부하고, 일상을 기록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창작은 나에게 생존과도 같았다. 고민 끝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인터뷰집을 만들기로 했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은 내 말에 눈물을 흘려주고 같이 공감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다. 내가 더 힘들까 봐 나를 배려해 주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가해자들의 거미줄 같은 연대를 보고도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결속도 결코 뒤처지지 않았으니까. 나의 중학교 친구는 나의 대학 동기와 친구가 되었다. 대학 동기는 나의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내 모든 친구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똘똘 뭉쳤다. 그리고 우리들의 인터뷰는 글로, 영상으로 조금씩 쌓여나갔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모습을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스러웠는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들으니 새삼 낯설었다. 친구는 경찰의 무책임한 말에 화가 났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경찰은 “가해자가 정말 가해를 저질렀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가해자의 집에서 찍힌 피해 사진을 보고서는 “제가 보기에는 다른 공간 같은데요, 이불이 다르잖아요.”라고 하기도 했다. 친구는 사건을 대충 무마하려는 경찰의 태도와,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인지 수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기가 찼다고 전했다.

 

또 다른 친구는 내가 사람들에게 변명을 하고 다닌 것이 속상했는지 내 말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나는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볼까 봐 항상 마음 졸였다. 피해를 당할 만 했다는 말을 듣거나, 진짜 피해자가 맞냐는 눈초리를 받을까봐 두려웠다. 정신과에 상담 치료를 할 때마저도 문란한 생활을 한 적이나, 짧은 옷을 입고 다닌 일이 없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우리의 인터뷰는 항상 눈물바다였다. 분에 차서 씩씩거리다가도 눈물을 흘리고는 서로를 껴안고 다독거렸다. 풍랑을 헤치고 간신히 뭍으로 도달한 사람들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 넘실대는 파도를 건너야겠지만, 많은 고비를 넘어왔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종종 무너지고, 모든 걸 던지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다. 왜 다른 피해자들의 짐까지 짊어지며 싸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친구와 가족, 연대자들의 물적, 정신적인 지지는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다.

 

내 작은 승리가 들불이 되어 번지길

 

나는 운이 좋았다. 싸우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으니까. 나는 사회가 바라는 완벽한 피해자였고, 관심을 가져주는 언론도 있었으며, 곁에 있어준 연대자도 적지 않았다. 가족은 날 보듬어주었고, 정부는 나에게 많은 혜택을 지원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도 항상 말하고 다녔다. 나는 운이 좋다고. 그러니 염려 말라고. 나와 함께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조의 말이기도 했다.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은 이런 일을 당할 리가 없으니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그 뒤는 나의 몫이다. 같은 일에서도 무엇을 배우느냐는 나에게 달려있다. 나의 희망은, 내가 더는 이 사건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꾸준히 성장하여 이 일이 작은 흔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나는 생존자다. 생존을 해야 가해자들을 무찌르든, 남을 도와주든 할 수 있다. 피해 회복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피해는 연속적이다. 끊을 수 없는 고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인생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살아남아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도 하고 싶은 일들이 점차 생기고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전에 좋아하던 노래를 찾아 듣게 되고, 먹고 싶은 음식도 종종 떠오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이 난다. 너무나 소중한 일상으로의 한 걸음들이다. 이제는 나에게도 5년 후, 10년 후의 삶이 있다고 믿는다. 내 작은 승리가 들불이 되어 다른 생존자들에게도 널리 번지기를.

기사입력 : 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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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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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21/07/20 [19:21]
와 진짜 가스라이팅 장난 아니게 무섭고 역겹다.. 어떻게 사귀는 상대에게 저러지. ㅠㅠ 생존자분 너무 대단한 분이고 응원의 힘을 막 보내고 싶어요!!
정당하다 21/07/20 [20:21]
당신의 모든 문장들이 정당하다고 느껴요. 살고, 창작하고, 기억하고, 만나는 당신의 투쟁을 응원합니다. 최은님의 인터뷰집과 연대하는 친구분들의 창작물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가을 21/07/21 [09:32]
이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복잡한 시간을 보내셨을지 감히 상상도 할수 없지만, 앞으로의 날들을 진심으로 응원해요. 글을 쓰시는 과정도 치유의 효과가 있으셨기를 바라요.
moana 21/07/21 [12:27]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간들을 벗어나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당신, 그리고 친구분들 모두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보내요.
응원 21/07/22 [18:45]
저도 다큐멘터리 완성되면 보고 싶어요!!
yu 21/07/26 [22:56]
응원할게요..!!
ㅎㄴㅈㅇ 21/08/05 [01:08]
다 같이 연대하며 이겨내고 있는 생존자분 항상 같이 응원할게요! 
KING 21/09/06 [17:12]
내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하면 가만히 있을까? 어떻게 악마가 생겨났을까?  이사회를 통째로 바꿔야한다.
asdf 21/09/15 [20:08]
재판이 끝날 때까지 힘내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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