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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YH무역 공장이 있던 “역사적 장소”에 서다
전태일은 알지만 김경숙은 모르는 당신에게①
나랑   |   2019-08-24

지난 8월 10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녹색병원에 새로운 현판이 하나 생겼다. 바로 “이곳은 YH무역 공장이 있던 자리”이며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이 있었던 역사적 장소”라는 현판이다.

 

▲ 최순영 전 YH노조 지부장이 임상혁 녹색병원장에게 현판을 전달하고 있다.    ©촬영: 나랑

 

역사에 남을 투쟁이 있었던 당시 YH노동조합 지부장이었던 최순영 씨(67세)는 활짝 웃으면서 임상혁 녹색병원장에게 현판을 전달했다. 그 시절 YH노조를 함께 이끌었던 권순갑 씨(부지부장), 이순주 씨(부지부장), 정만옥 씨(대의원)도 함께했다. 녹색병원, 중랑희망연대, 중랑마을넷이 공동 주최한 자리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79년 8월 11일은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에 맞서 신민당사에서 생존권 투쟁을 벌였던 날이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노조 간부였던 김경숙 열사가 목숨을 잃은 날이기도 하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김경숙과 그의 친구들은 바로 이 자리, 면목동의 YH무역 5층 건물에서 일하고 꿈꾸고 또 투쟁했다.

 

1979년 YH무역은 폐업했고 신민당사 투쟁 끝에 YH 여성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 건물의 골조는 녹색병원이 그대로 이어받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작은 가발공장이던 YH, 3년만에 노동자 4천명 규모 업체로

 

YH노조 투쟁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신민당사 농성으로 유신체제 붕괴를 가져온 신호탄’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어용노조가 득세했던 시대에 ‘여공’이라고 무시당하던 젊은 여성들이 스스로 만든 민주노조였으며, 간부 또한 전부 여성이었고, 그 어느 노조보다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운영됐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신호탄으로 알려진 YH 노조의 신민당사 농성 현장.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제공 사진

 

1966년 장용호는 동서 진동희와 함께 왕십리의 콩나물 공장을 빌려 사업자금 100만 원, 직원 10명의 작은 가발공장을 시작했다. 자기 이름의 영어 이니셜을 따 회사 이름을 ‘YH무역’으로 지었다.

 

1960년대 정부는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을 목표로 가발, 신발, 섬유 등 경공업을 집중 지원했다. “담보가 없어도 수출한다고 하면 정부가 특혜를 줘서 땅을 사게 하고 건물을 짓게 하는”(최순영) 식으로 말이다.

 

이에 힘입어 YH는 1968년 면목동 5층 건물(건평 4천 평, 대지 2천 평)을 지어 공장을 이전했다. 회사 창립 3년만인 1970년에는 순이익 12억7천만 원, 노동자 4천 명인 국내 최대 가발업체가 되었다. 당시 수출 순위 15위 기업으로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사측, 노동자들에게 가야 할 상여금 10억원 빼돌려

 

그즈음 장용호는 동서 진동희를 사장으로 앉히고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미국에서 YH 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호텔과 백화점 등을 지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사장이 된 진동희는 1970년 장부상으로는 노동자들에게 상여금을 준다고 해놓고는 10억 원을 빼돌려 그 돈으로 1973년 대보해운 주식회사를 차렸다,

 

여성 노동자들의 피땀이 어린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은 이렇게 자본가들의 주머니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갔고 YH무역은 서서히 기울어갔다. 이때부터 사측은 여성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부가 더이상 경공업이 아닌 중화학 공업을 통한 경제성장으로 방향을 튼 것과도 맞물렸다. 

 

1974년에 YH는 은행 빚이 6억3천만 원에 달했다. 장용호는 1973년 미국에서 YH 가발 300만 불어치를 외상으로 사들인 후, 3년이 지나도록 돈을 갚지 않았다. 1975년부터 YH는 급격한 하향길에 접어들었다.

 

▲ 지난 10일 녹색병원, 중랑희망연대, 중랑마을넷 공동 주최로 “YH무역 여성노동자 투쟁 40주년, 2019 여성노동을 말하다” 토크쇼와 함께, 녹색병원 복도에는 YH 투쟁 사진전이 열렸다.     ©촬영: 나랑

 

“어린 여성노동자들 한 명 한 명을 다 돈으로 봤으니…”

 

YH무역에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한 십대, 이십대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경공업은 많은 여성을 고용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시키는 것에서 이윤을 냈다.

 

“어린 여성 노동자들 한 명 한 명을 다 돈으로 봤”으니 ”마산수출자유지역의 기업들은 관광버스로 농촌을 돌면서 어린 여성들을 대거 싣고” 오는가 하면, YH의 경우에도 “명절에 고향에 가서 친구 한 명 데리고 오면 휴가를 며칠 더 주는”(최순영) 식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아동 노동은 금지되어 있어서, 일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언니 주민등록증을 빌려 가짜 신분으로 일하기도 했다.

 

최순영은 “시골에서 친구 따라 가발기술을 배웠는데, 서울 가면 돈을 더 잘 벌 것 같아서 친구 동생 따라 무작정 서울로 온” 경우다. 그가 처음 간 곳은 당시 마장동 천변에 늘어선 무허가 건물 중 염색 공장이었다. “(일이 너무 고되고) 냄새나고. 밥도 양철 빠께스에 국을 퍼 왔는데 돼지기름 둥둥 떠 있고 도저히 못 먹겠는 거야.” 최순영은 거기서 나와 YH에 다니고 있던 친구 언니를 무작정 찾아가 취직시켜 달라고 했다.

 

YH는 달랐다. “새로 지어서 건물도 5층인데 깨끗하고 난방도 스팀으로 아주 잘 돼 있었고요. (…) 수세식 화장실도 있고 하여 마장동하고는 비교가 안 될만큼 좋았어요.”(최순영)(<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김원, 이매진, 2005)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저자 김원에 따르면,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홀로 고향을 떠나 돈 벌러 가는 것에 심적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장에 취직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번듯한 현대식 공장 건물에 기숙사까지 갖추고 있고 임금도 다른 곳보다 많이 받을 수 있는 원풍모방, 동일방직, YH무역 등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매혹’이었다고 한다. 믿을 만한 연줄이 없으면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아 재수를 하거나, 관리자 집에 가서 1년간 “식모살이”를 한 끝에 입사할 정도였다.

 

김경숙 열사 또한 YH에 입사한 것을 감격스러워했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읜 김경숙은 국민학교 졸업 후에 양복점 시다도 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다 “도둑년”으로 몰려 쫓겨난 적도 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하청 봉제 공장을 전전했지만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반복되는 잔업과 철야에 몸은 망가져 가고 있었고 월급도 떼먹히기 일쑤였다. 김경숙에게 난생처음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들어간 곳, YH무역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하루 12시간, 14시간 일하며 서로 의지한 언니 동생들

 

그러나 YH의 노동 현실은 하청 봉제 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YH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12시간, 14시간 심지어는 24시간 일하는 날도 있었”(최순영)다. 당시 월급은 한 달 평균 고작 28,805원이었다.(당시 노총이나 정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인당 최저생계비는 32,000원 정도였다. “[KBS 인물 현대사] 여공, 유신을 몰아내다 - YH 사건 김경숙”, 2005년 2월 방영)

 

여성 노동자들은 이렇게 번 돈을 집에 부쳐 가난한 집안을 먹여 살렸다. “부모님 약값 대는 친구도 있었고, 돈 벌어서 시골에 땅뙈기도 사주고 소도 사주”면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남자 형제 학비를 대며 비록 자신은 국민학교만 졸업했지만 오빠나 남동생만은 꼭 대학을 가길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이들은 각종 계를 했는데, 시골에 있는 부모나 형제를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 바로 ‘보름달빵계’다. “처음에는 빵계를 한다길래 내가 혼자 빵을 다 먹는 건가 했어요.(웃음) 10시까지 연장 근로하면 보름달 빵을 하나씩 주는데 시골에 있는 동생 생각이 나서 빵이 목으로 안 넘어간다는 거야. 열 명이 계를 해서 한 명한테 몰아주면 집에 부치는 거였죠. 집에 있는 동생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최순영)

 

▲ YH무역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투쟁한 동료들. 오른쪽 끝이 김경숙.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당시 면목동은 YH무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상권이 형성돼 있었다. 가장 많을 때는 여성 노동자가 4천 명이었고 회사 기숙사에만 많을 때는 2천여 명이 살았으니 YH 월급날은 그동안 공장 주변 가게 외상 장부에 달린 외상값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날이었다. “YH가 임금을 체불하면 면목동 경제가 마비된다”(최순영)고 할 정도였다.

 

농촌에서 상경한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 근처의 사설 기숙사에서 살다가 나중에 회사에서 기숙사를 지은 후에는 거기서 살았다. 회사 바로 옆에 있는 기숙사는 회사에겐 노동자들을 즉시 동원해 부려먹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에겐 공동체의 기반이 되었으며 훗날 노조 결속력의 토대가 되었다.

 

한방에 보통 열 명이나 많으면 열두 명까지 함께 생활했다. “처음에 오면 문 바로 옆에서 자고 고참이 될수록 뜨듯한 윗목에 가서 자는”(최순영) 시스템이었다. 겨울에는 찬물에 고무장갑 끼고 머리를 감기도 하고 같은 방에서 붙어살다 보니 서로에게 이가 옮기도 했다.

 

주말에는 기숙사 주변 양장점에 가서 옷을 맞추거나 자장면을 먹고 같은 방 식구들끼리 영화를 보러 가거나 등산을 하기도 했다. 필요한 물건은 동대문에 가서 공동구매를 했다. 물론 때로는 아끼는 물건이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사소한 말다툼도 있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온 그들에게 기숙사의 언니, 동생들은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왕따 없는” 공동체, 가족과 같은 끈끈한 존재였다.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며 ‘작업 거부’ 행동에 나서다

 

가발은 모발을 하나하나 심어서 만들어졌다. 여성 노동자 대부분은 생산과에 배속되어 일했는데 모든 작업은 ‘도급제’로 진행됐다. 도급제는 작업 물품에 단가가 매겨지고, 일정한 노동시간 동안 개인이 작업한 성과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체계다. 이는 노동자들의 초과 노동을 유도하고 경쟁을 조장함으로써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임금체계였다.(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이매진, 2005) 이런 구조 속에서는 일감이 많을 땐 좋을지 몰라도 공치는 날이 많을 땐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일이 없을 땐 돈을 꿔서 기숙사비를 겨우 내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도급제 노동자에게는 제품의 단가가 임금과 곧바로 직결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당연히 단가 책정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YH에서 1975년 3월, 건조반 단가가 너무 낮다고 공장장에게 항의한 건조반 감독이 다른 반으로 강제 부서이동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건조반 2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부당한 인사이동에 항의하며 작업을 거부했다. 그 배경에는 극심한 노동강도와 저임금 현실이 있었다.

 

작업을 거부한 여성 노동자들은 상봉동 천주교회에 모였고, 이때 가톨릭노동청년회 이철순을 만나 처음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건조반 조장들이 경찰이 연행되면서 3일간의 작업 거부는 막을 내렸지만, 이 사건은 YH 여성 노동자들의 결속력을 확인하는 계기였으며 YH 노동조합 결성의 마중물이 된다.

 

▲ 면목동 녹색병원 주차장에 남아있는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기숙사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한국여성노동자회

 

건조반 조장 중 4명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깨닫고, 최순영과 함께 다방에서 전국섬유노조 조직부장을 만난다. 당시 최순영은 수제반 고참으로, 평소에 도급단가 문제에 대해 회사 측에 바른 소리를 자주 해서 동료들에게 신망을 얻어왔다. 최순영은 이때 “8시간만 일하면 되고, 추가로 일하면 수당을 준대, 퇴직금도 준대. 그런 건 공무원이나 받는 건 줄 알았는데 (노조 만들면) 그런 걸 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일이 회사에 발각되면서 건조반 조장 4명은 해고당하고, 최순영은 강원도 횡성군 소재 하청공장으로 출장 명령을 받게 된다.

 

불 끄고 이불 뒤집어쓰고 9백 명 노조 가입원서 받아

 

그러나 건조방 조장 4인방은 해고 후에도 계속해서 노조를 결성하려 시도한다. 이후 YH노조 사무장이 된 민경애 씨는 “(건조반 조장 언니들이) ‘우리 복직시키려면 노조 만들어야 한다’는데 어떡해, 만들어야지”(영화 <꽃다운>, 장희선 김진상 연출, 2009)라고 말한다. 이들의 동료애가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사의 거듭되는 방해 공작으로 세 차례의 노조 결성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노조 결성은 더욱 절박해졌다. 노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기숙사 몇 호실로 모이라는 쪽지를 돌린 뒤, 방에 불을 다 꺼놓고 이불을 덮은 채로 사측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신발을 모두 기숙사 방 안으로 넣고서 교육이 진행됐다.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김원, 이매진, 2005)

 

최순영은 이렇게 “이불 뒤집어쓰고 9백 명의 노조 가입원서를 받아냈다”고 기억한다. 1975년 5월 24일, 마침내 YH노조가 설립된다. 조합원들은 최순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회사는 하청 공장으로부터 돈을 받고 불량을 통과시켰다는 혐의를 씌워 최순영을 해고했다. 그러나 복직 투쟁 끝에 최순영은 여름에 공장으로 복직했고, YH노조는 최초의 노사협의와 상여금 투쟁을 거치며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참고 자료]

*한국여성노동자회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귀] 시즌5-12, ‘70년대 언니들, 어쩌다 노동운동 하게 된 썰_YH 김경숙을 아시나요’, 시즌5-13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여성노동자_YH 김경숙을 아시나요’

*“YH 무역 여성노동자 투쟁 40주년, 2019 여성노동을 말하다” 토크쇼 참가자 최순영, 권순갑, 이순주, 정만옥의 구술 (2019년 8월 10일 녹색병원 강당. 주최: 녹색병원, 중랑희망연대, 사단법인 중랑마을넷, 도움: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다큐멘터리 영화 <꽃다운>, 장희선, 김진상 감독, 2009

*< YH 노동조합사 >, 전 YH 노동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형성사, 1984

*<김경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김원, 이매진, 2005

*[KBS 인물현대사] 여공, 유신을 몰아내다-YH사건 김경숙, 2005년 2월 방영

기사입력 : 2019-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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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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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19/08/25 [09:06]
녹색병원이 이렇게 의미있는 자리에 세워졌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black b 19/08/25 [17:03]
학생들에게 읽혀주고 싶은 기사입니다. 2편도 기대할게요.
양파 19/08/27 [11:11]
예전에 최순영 의원이 박근혜에게 쓴 편지가 한창 회자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좀 오버다, 그렇게까지 하는 게 정치적인 느낌이  들고 인위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기사를 보니까 최순영씨의 그때 글이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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