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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공감의 ‘정신장애인 서사’ 따듯하지만 아쉬워
다른몸들이 읽는 드라마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박목우   |   2024-03-30

[기획의 말] 미디어에서 질병은 회복이나 죽음으로 결론 나거나, 질병으로 인해 삶이 성장한 것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이런 주류 질병 서사를 비판하며, 새로운 질병 서사를 써온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을 하는 ‘다른몸들’에서 미디어 속 질병과 장애를 이야기합니다.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포스터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의 ‘정신장애인 되기’

 

정다은(박보영 분)은 내과에서 정신건강의학과의 병동으로 자리를 옮겨온 간호사이다. 그러나 무능력했던 내과에서와는 달리, 뜻밖에도 그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일상은 환자들과의 화해와 따듯함을 이루는 공감과 확장의 에피소드가 되어간다. 자신만의 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면서 정다은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된다. 급기야 정다은 자신이 자살시도를 하게 되면서 그는 폐쇄병동에 강제입원 당한다. 그의 ‘정신장애인 되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복직한 지 얼마 안 되어 정다은이 우울증으로 입원해 있던 폐쇄병동에 함께 있던 환자가 그녀를 알아보면서, 입원환자들의 보호자들이 자신들의 귀한 가족을 정신병자에게 맡길 수 없다며 시위를 시작한다. 자신이 조현병을 가진 동생의 보호자이기도 한 수간호사(이정은 분)의 설득이 시작되고, 결국 가족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세상의 편견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위를 멈춘다.

 

우리가 공감할 때

 

드라마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정신장애를 생물학적으로만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이며 개인적인 상황과 맥락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예고편 중. https://www.youtube.com/@NetflixKorea


첫 장면에서 옷을 벗고 병동을 뛰어다니는 여성 환자에게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자신의 기대만을 강요했던 어머니가 있었고, 차라리 그는 옷을 벗고 뛰어다닐 때 사람들이 비웃어주는 것을 바라는 기묘한 증상이 생기게 된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을 가장하고 있는 가식을 벗어던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비웃음은 그 퍼포먼스를 보면서 그를 감싸고 있던 것이 가짜임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의 벗은 몸은 남들과 다르지 않게 그토록 보잘 것 없다는 것에 대한 솔직한 폭로가 되는 것이다. 그 비웃음을 통해서만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

 

누군가 당신이 없는 사이 자신이 키우던 반려견이 다른 사람들 손에 의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보통 안심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심지어 화를 내고 고성을 지른다면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다고 보지 않을까. 그에게는 이유가 있다. 흔히들 “쪼인다”라고 말하는 직장 상사에 의한 괴롭힘을 심하게 겪은 그에게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반려견의 건강 관리와 애정이었다. (사회에서) 그가 사라진다면 슬픔에 빠질 한 생명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과 존재를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의 시선을 반려견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기에 절망한 것이다.

 

다은은 이러한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 적합한 돌봄을 제공할 줄 아는 이였다. 또한 스스로를 게임 속의 마법사라 여기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던 환자가 퇴원 후 가혹한 현실과의 만남 속에서 다시 정신병동에 입원하기 위해 ‘가짜 환자’를 가장했을 때, 가장 먼저 그것을 알아차린 것도 정다은이었다. 치료진이 그에게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환자의 절망을 다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다시금 환상 속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마법사가 되어 날아오른다. 공무원 시험 학원이 있는 빌딩 꼭대기에서. 공무원 시험에 7번 시도했다 실패했던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고, 그 미래에 대한 보상심리로써 자신의 환상을 만들어냈으며, 현실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어 찾아갔던 병동에서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절망을 이겨낼 환상을 다시금 만들어냈던 것이다.

 

영국의 반(反)정신의학자 로널드 랭이 저서 『분열된 자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장애란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시청자 스스로 정신장애인의 현실에 대해 파악해 볼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준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기존의 병리화되고 범죄화된 정신장애인의 서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냈다. 정신장애인의 증상을 하나의 이야기로 조직화해 낸 것이다.

 

▲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등장인물들 모습.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를 본 후에는 그 빛이 그려내는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 말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언젠가 한 자리에서 ‘시설병’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치매 노인과 발달장애인과 조현병을 가진 정신장애인을 함께 시설에 몰아넣으면, 처음에는 각자의 개성이 있지만 나중에는 다 똑같아진다고 한다. 똑같이 무능력하고 똑같이 수동적이 된다는 것이다. 자유가 통용되지 않는 억압적인 현실에서 삶이 기인하기 때문이다. 통제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개인의 영혼은 그렇게 지워진다.

 

한 기자분은 자신이 오래된 정신요양원에 취재를 갔을 때, 취재대상이었던 아무 말이 없는 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다고 한다. 같이 있는 동안 줄곧 손을 잡고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아무 반응이 없던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꼭 쥐더란다. 이미 말을 잃었지만, 자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 아주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표현하는 그분의 모습에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오더라고 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다섯 단어 이상을 말하기 어려웠던 섬어(선망과 같이 환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단편적인 말하기를 뜻한다)의 시절. 아무도 나의 말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저 아이는 말이 없고 그래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저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내 안에 들끓고 있는 말들이 어떤 것인지를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이는 것은 맥락도 닿지 않는 겨우 몇 마디의 말, 그것뿐이었으니까. 고백하자면 지금도 어느 자리에 가든 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상황과의 소통이 어렵고,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에서 제외되고는 한다. 보이지 않는 ‘이유’와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그렇게 서로 부정적인 힘으로 결합한다.

 

그 쓸쓸했던 시절. 아픔에 공감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말이다. 내게 말할 자리를 주고 ‘너의 서사를 써 보라’고 하였다. 과제로 던져준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로 감싸주며 말을 걸었다. 나의 이야기가 상대방의 귀에 닿는 느낌. 나의 말을 듣는 것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이들. 나를 불행 속에 놓아두지 않았던 사람들. 처음으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다른몸들’의 아픈 몸들의 공동체 〈질병과함께춤을〉에서의 일이다.

 

▲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예고편 중. https://www.youtube.com/@NetflixKorea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가장 아쉬웠던 점도 여기에 기인한다. 드라마는 사회적인 것을 말하지만, 이탈하는 것은 개인일 뿐이다. 그들이 돌아가야 하는 일상은 여전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인 병동과 대비되는 정상적인 현실이다. 실패는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맞도록 훈육될 때까지 병동에 갇힌 채 자기 자신만의 서사를 잃게 된다. 그것이 의사가 아닌 환자들이 정의하는 ‘병식’(스스로 자신이 정신적으로 아프고 치료가 필요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의 의미다. 그것은 ‘너는 정신병자’라는 낙인과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사회는 아직 광기와 동등한 주체로서 대화를 시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개의 경우 정신의학은 환자의 말에 오래 귀를 기울일 수 없는, 산업화된 시스템 속에 놓여 있다. ‘3분 진료’라는 우스갯소리는 현실인 것이다. 정신장애인은 의사의 처방과 권고를 받아들이면서, 모든 정신장애인을 균일하게 만드는 정신의학의 권력 속으로 편입되어 간다. 그 중심에 약물이 있다. 약물을 복용하면서 그것만이 치료라 믿으며 정신장애인은 ‘정상화’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끝은 사회로의 복귀이겠지만, 수많은 정신장애인들은 평생을 낙인 속에 살면서도 병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약 부작용은 잘 이야기되지 않지만, 환자에게는 커다란 억압이다. 치료진에게는 차분해진 모습이 환자에게는 멍하고 바보스러워졌다고 느낄 만큼 인지가 둔화된 상태라 느낄 수 있다. 치료하는 입장과 치료받는 입장의 권력 차이는 환자를 침묵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약 부작용으로 일상이 파괴된 채로 살면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중에 나이가 들고, 어느 날 문득 거울에서 한없이 무능력해진 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회는 정신장애인의 이질성과 타자성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있는가? 현대사회의 획일화된 제도들과 일상들에 숨어 있는 ‘정상화’의 기제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는 단지 이상함일 뿐이다. 또한 무가치한 것이다. 정상화는 규율을 부과하고, 그 규율에 맞지 않는 몸들을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추방한다. 정신병원, 요양원, 기도원 등등 정신장애인이 수용되어있는 곳들을 떠올려주길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통제를 더한다. 자신들이 정상적인 생각과 행위라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생각과 행위 혹은 삶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정신장애인의 몸은 아주 불길하거나 위험한 신체인 ‘비체’(卑體, abject.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는 존재)로 격하되며, 사회의 안전을 위해 바깥으로 치워진다. 아무도 이들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는다. 설사 염려하더라도, 정상화의 담론에 잠식되어 있는 세계에서 이들의 추방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담론은 무수하다. 개인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다정한 서사가 한없이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면서도 아쉬운 것이다. 정신장애인의 삶은 선의를 가진 간호사 개인의 힘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료와 보호를 받고자 입원했으나, 정신병원에서의 훈육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여 더 통제적이고 열악한 의료환경 속으로 떨어져 내렸던 1970년대 미국의 정신장애인 활동가 쥬디 챔벌린이 쓴 책 『우리 스스로』는 이 점을 설득력 있게 증언한다. 그러니까 현실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힘이 있는 구체적인 담론인 것이다.

 

왜 정다은은 환자가 자살을 선택했을 때 그가 속한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는가? 그의 우울은 정말 치료받아야 할 “이 병동에서 가장 어두운 얼굴을 한 이”의 생물학적 병일 뿐인가? 대화와 소통이 정말 병을 치유할 수는 없는가? 세계 바깥에 대해서 왜 우리는 구조의 변화가 아닌 연민 이상을 가지지 못하는가?

 

▲ 영국의 사회보장 제도와 부조리한 시스템을 고발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감독, 2016) 중 다니엘이 자신의 이름을 쓴 벽 앞에 서 있다.


2016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자신을 빈곤으로 몰아넣었던 행정 체계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정부 기관의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 장면이다. 몰리고 몰리다 영국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을 인식하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름을 새겼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정신장애인도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수많은 정상화의 담론을 통해 권력을 생산하며 예속화하는 시스템 안에서 대항적인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은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다만 우리 자신의 진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면 된다. 이질성과 타자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일 테다. 지배의 부정적인 질서를 파괴하며 소수자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소수자들과 위계 없이 평등한 관계를 이루며, 나와 그들 사이에 생성되는 연결지점들을 발견해 가는 것. 그러면서 서로 변화를 발명해 가는 것. 진실은 그 관계의 사이 어디쯤에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기사입력 : 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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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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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24/03/30 [23:26]
해방은 어디로부터 올까요... 주변에 온통 정신질환이 넘쳐나는 시대, 정신과에 예약잡기조차 어려운 이 시대에, 정신장애인으로서 사회에서 기입되지 않고 스스로 새기는 이야기들이 기다려집니다. 저또한 의사와 상담치료사, 약물과 처방에 매이지않고 싶어요. 단지 내가 '히스테리컬한' '피해의식에 휩싸인' '분노가 많은' 인간인 것이 아니라, 아프고 있기때문에 아픈 이들과 연결되고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의 곁에 있고, 분노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것. 타자에 대한 연민을 잃지않고, 미친존재라도 내안에 있는 다정함을 끝끝내 기억해내는 것. 기사 잘 읽었습니다. 
염소 24/03/31 [18:19]
정신장애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정신장애가 수면 위로 올라왔으면 좋겠고, 정보도 많아졌으면 좋겠고, 개인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도 열심히 봤어요. 나름 반전이 있는 게 좋았습니다. 드라마적이라 현실과는 좀 다르다는 거 예상하고 봤지만, 이 기사를 보면서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게 좋았습니다.
최현숙 24/04/01 [06:40]
지난번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구술사 강의에서 온라인으로 만났던 최현숙이에요. 목우 선생님 글을 제게 늘 큰 공부가 되어요. 특히 제 주변에서 만나는 정신장애인과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갈 지에 대한 태도를 더 돌이켜보게 하고, 제 속의 남은 편견을 깨닫게 해주어서 매번 감사합니다!!^^ 오늘의 문단 "수많은 정상화의 담론을 통해 권력을 생산하며 예속화하는 시스템 안에서 대항적인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은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다만 우리 자신의 진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면 된다. 이질성과 타자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일 테다. 지배의 부정적인 질서를 파괴하며 소수자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소수자들과 위계 없이 평등한 관계를 이루며, 나와 그들 사이에 생성되는 연결지점들을 발견해 가는 것. 그러면서 서로 변화를 발명해 가는 것. 진실은 그 관계의 사이 어디쯤에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 명심하겠습니다!!
한예준 24/04/02 [22:51]
저도 어릴적, 세상에 기여하고 도움되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삶의 상식적인 바른 자세라 생각되어 정신장애계에 기여할 것을 마음먹고 5~6살때 그 마음을 먹고 평생을 설계했습니다 결국 군대에서 조울증 진단 받고 지금 40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력이 약해서 참고만 겪고 만 지냈지만 이젠 성격이 많이 오픈 되고 진리의 마음가짐으로 매일 다지며 정신장애계가 좋아질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기쁘게 행복하게 깨어 있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불평등, 편견, 차별, 가난과 폭력에 대응합시다. 우리는 모두가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의식이 번져나가 동일성을 일으켜 모두가 행복을 원하는 깨어나는 시대가 되는 것은 현실이고 이 시대의 젊은 층은 그것을 당연 시 할 것입니다. 상식이 상식 화 되는 이 시대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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